이야기

[소설] 제논

질문자 캐릭터 아이콘뿌리활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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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유저수915

작성 시간2018.04.28

 네가 나에게 왔다.
 무채색 회색빛, 나의 세계로 네가 들어왔다. 까맣게 덧칠해진 기억 위로 네가 그려진다. 깍여나간 머릿속으로, 뜯긴 심장으로 네가 스며온다.
얼굴 가죽 밖에 남은 게 없는 나는, 이제 인간도 무엇도 아닐진대 너를 보면 그런 사실조차 잊게 돼.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색은 너의 팔에 흐르는 붉은 피였고, 그 색이 옮아 나를 태웠어. 아팠고 이상했어.
내가 기억하는 한 내게는 통각의 중추가 없을텐데, 네 붉은색 피가 날 이상하게 만들었어. 너 때문에 내게도 색이 생겼어. 수없이 봐온 다른 피들은 이제 모르겠어. 그것들은 기억도 안나.
 다만 너의 것만이 나를 적셨어. 지그문트. 이게 무슨 뜻일까. 너는 알고 있어? 이미 인간이기를 잊은 나와 달리, 너는 알고 있지?

 네가 고마워. 나를 잊지 않아서 고마워. 나를 믿어줘서 고마워. 내게 와줘서 고마워. 고마워. 정말 많은 게 고마워.
너는 내가 널 구했다고 하지만, 나는 네 덕분에 삶을 얻었어. 네 덕분에 살아났어. 네가 날 살렸어.
고마워.

 너로 인해 나는 삶을 얻었고 의지를 가졌어. 너를 따라 세상으로 나왔고 너를 위해 떠나. 그래도 알아. 내가 가는 모든 길이 이어져 너를 향할 것임을. 그 길의 끝에 웃는 네가 내게 손을 내밀 것임을.
 나는 기꺼이 온몸으로 그 길을 달려갈 것임을.
질문자 캐릭터
질문자 캐릭터 아이콘뿌리활력 Lv. 0 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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