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설원의 음유시인(소설화). 1화.
어린 시절, 사람들에게 [눈을 좋아하느냐] 고 물으면, 대개는 불쾌한 기색으로 무시했고, 몇몇은 버럭 화를 내기도 했다. 사시사철 눈이 오는 이곳, '엘나스' 에는, [눈보라, 추위, 기아] 만큼 흔해빠진 것이 없었다. 그것은 전쟁만큼 가혹하고, 전쟁과 함께라면 더욱 그러했다.
episode iv : 설원의 음유시인.
엘나스의 사람들은 눈을 [천벌] 이라고 믿었다. 일리없는 말은 아니다. 이 시대의 인간들은 정말이지 비참한 것들을 만들어내는 데 일가견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작은 바람에서 비롯된 억지... 같은 것이지만 아마도 눈은...
"사랑이지."
"사랑... 이요?"
내 말에 헤이즈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투로 물었다.
"예쁘잖아. 하얗고."
내 답에 헤이즈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왜? 맘에 안 들어?"
"그야..."
헤이즈의 애매모호한 대답에, 나는 살짝 미소 지으며 흩날리는 눈들을 보았다.
"대장님. 병력 배치 끝났습니다."
"전투 개시해."
"예."
정적을 깨고 나타난 것은 용병대의 병사였다. 병력 배치가 끝났다는 그의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전투 개시를 지시했다.
뿌우우우웅!
전투 개시를 뜻하는 나팔 소리가 퍼져 나갔다.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저 소리는 언제나 내 기분을 씁쓸하게 만든다.
챙! 챙챙!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내 귀로 생생하게 들려온다. 분명 저 병장기는 누군가를 죽이겠지.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일 뿐이니까.
"그나저나 저건 뭐야?"
나는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잡생각을 몰아내고자, 저 멀리 보이는 탑을 가르키며 헤이즈에게 질문했다.
"봉화탑이라더군요."
"봉화탑?"
"종말이 다가올 때 위험을 알리라고 만들었다고 합니다. '드래곤 마스터' 의 작품이죠."
종말이라는 말을 듣자, 병장기의 기세 좋은 울림들이 더욱 선명하게 내 귀에 들렸다. 생명을 빼앗는 전쟁이야말로 진정한 종말이 아닐까?
"종말이라면 바로 지금인데. 그 드래곤 마스터라는 녀석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멸망한대도 어색하지 않은 시대였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부수고 있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들 중 하나라는 것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다.
"겨울이 오는데 민가는 다 타버렸고, 저 많은 난민들은 모두 어디로 갈까요?"
헤이즈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난민들의 피난 행렬을 보고는 말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난민들이 가볼 곳을 생각해보다가, 지금 우리들의 처지도 다를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갈 곳이 없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인걸."
우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왕을 위해 싸웠다. 조금 순진했던 시절에는 그의 적이 모두 사라지면 전쟁도 끝날 거라 밑었다. 그게 착각이었다는 것도 이미 오래 전에 깨달았지만,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저, 저기..."
"뭐니 꼬마야?"
피난 행렬에 끼어든 꼬마 하나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헤이즈가 무슨 용건인지 물어보자, 꼬마는 낡은 하프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하프... 500메소요."
"멋진 하프로구나. 자, 500메소다."
내가 꼬마의 작은손에 500메소를 쥐어주자마자, 꼬마는 빠른 속도로 다시 피난 행렬에 합류했다.
"음악에 관심이 있으신 줄은 또 몰랐군요."
"몰랐어? 원래 내 꿈이 음유시인이었어."
"... ..."
헤이즈는 별 해괴망측한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침묵했다.
"그나저나 이제 어쩌면 좋겠습니까? 옆 나라에서 또 내전이 일어난다는데 그리로 갈까요?"
"은퇴하련다. 용병단 너 가져라."
"또 이러시는군요. 물론,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잘 있어라. 굶지말고."
홧김에 내뱉은 말이지만, 내 손에 들려있는 하프를 보니, 꿈을 이루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나스를 떠도는 '설원의 음유시인'. 좋은 어감이지 않는가?
"예? 어, 대장 어디 가십니까?"
나는 헤이즈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
"대장?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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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후... 설원 어딘가.
"으으으 추워... 이 동네는 왜 이렇게 쓸데없이 추운 거야?"
한 소녀가 내가 앉은 바위 아래서 엘나스의 추위에 대해 푸념을 했다. 저런 드레스 차림으로 춥다고 푸념하니 꽤나 황당했다.
"여기 어디쯤에 있을 텐데... 정말 코빼기도 안 보이네."
"끼잉?"
"앗? 드디어 찾았다! 이리 온~ 귀여운 녀석."
"그응? 크르르르르."
소녀는 가시곰이 두렵지도 않은건지 미소를 지으며 가시곰에게 이리로 오라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응? 왠지 분위기가..."
소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챘는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니? 혹시 무슨 화 나는 일 있니?"
"크르르르르."
"어... 일단 그럼 화가 풀린 후에 다시 올까?"
"크르릉!"
어이쿠. 드디어 사고를 쳤다. 가시곰은 화가 난 표정으로 앞발을 들어 올렸다. 저대로 소녀에게 내리치면, 그녀는 절명하겠지. 그렇게 둘 수는 없다.
"어멋?!"
가시곰이 앞발을 내려치려고 하자, 나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하프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 ..."
"뭐야, 음악 소리를 듣더니 얌전해졌잖아?"
"근처에 어린 **가 있는 거야. 평소엔 온순한 녀석이지만 **를 지키기 위해서는 흉폭해지거든."
내가 하프의 현을 튕기며 소녀에 가시곰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소녀가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뭐야, 나도 그 정돈 알아. 누구야 당신?"
"나? 지나가던 음유시인이라고 해두지."
음유시인이라니까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다. 음유시인에게 필수라고도 할 수 있는 그것.
"예명은... 흠 뭐로 하지?"
"예명 같은 거 물어본 적 없거든? 훌쩍..."
추위에 코를 훌쩍이는 그녀를 보자, 갑자기 뇌리에 스처지나간 생각이 있다.
'음? 설마 저런 얇은 드레스 차림으로 여기까지 온 건가?'
"에... 에에..."
기침의 징조다. 저런 얇은 드레스를 입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엣츄!!"
"이크, 현이 끊어졌네."
소녀의 의의로 큰 기침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서 하프의 현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겨우 진정시켰던 가시곰이 다시 날뛸 것임이 자명했다.
"크르르르르."
"어멋?"
슈웅!
가시곰이 다시 앞발을 들어 내리칠 기색이 보이자, 나는 바위에서 뛰어내려 소녀의 앞에 착지했다. 그러고는 반사적으로 들고있는 하프로 가시곰의 머리를 쎄게 후려쳐 쓰러뜨렸다.
"이런, 나도 모르게 하프로 후려쳐버렸잖아? 마일러가 또 잔소리를 늘어놓겠군."
"아... 아아!!! 사흘 만에 겨우 찾은 녀석인데!! 물어내!"
소녀는 죽어버린 가시곰을 보고 절규했다. 뭔가 절규하는 이유가 이상한 것 같지만, 신경쓰면 지는 거다.
"에... 에... 엣츄!!"
"당돌한 아가씨네."
다시 한번 기침하는 소녀의 입술은 파랬다. 그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소녀는 아마도 저 드레스 차림으로 며칠동안 가시곰을 찾아 헤멘듯 했다.
"입술이 파랗잖아. 따라와. 따뜻한 차라도 대접하지."
"하지만..."
내 쪽 상황도 그다지 좋은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 소녀에게 몸을 녹일 수 있는 휴식처 정도는 될 것이다.
"대신에 다른 녀석을 잡을 수 있게 도와줄게. 어서 몸을 녹이지 않으면 감기로 그치지 않을 걸."
"뭐? 흠... 좋아. 약속한 거다."
귀여운 아가씨다. 깊은 설산에 어울리지 않는 복장... 어떤 사연일까? 글쎄, 잘 모르겠다. 혼란한 세상이니까,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지.
'천막을 어디에 세웠더라...'
뭔가 길을 잃은 것 같다...
갓데벤입니다
2017.08.17
대단한 필력이십니다!
BN영희
2017.08.10
곧이어 나의 눈앞에 파란색 회오리가 오고 나는 시공의 폭풍으로 빠지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