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cebo effect:위약효과
(feat. 미하시그)
어느 때와 같은 날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임무를 끝마치고 꽤나 오랜만에 에레브에 돌아와서 여제를 알현하러 가는 길이었다.
"미하일."
누군가 나를 불렀다. 나는 눈 앞에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나와 같은 금발의 머리카락이 길고 풍성하게 드리우고 나와 같은 벽안이 반짝였다.
그렇지만, 그녀의 기사인 나하고는 너무나도 다르게 연약하고, 여린 모습의 어린 여제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그녀와 눈빛이 마추쳤을 때에 나의 세계는 닫혀졌다.
오직, 여제를 위하여.
눈치채지 못하도록 최대한 자연스럽게
"네. 여제님."
이라는 짧은 대답이 겨우 입 밖에 나왔다. 그렇지만 나의 감정은 숨길 수 없었다.
"미하일? 목소리가 떨려요. 괜찮나요?"
여제는 걱정스럽다는 듯이 묻는다.
"알현하러 가는 도중에 이렇게 만난다는 것이 긴장되네요."
나는 그렇게 돌려말했다. 그녀는 아직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그녀를 볼 때마다 취한 것 같이 심장이 계속 뛴다.
마약같이 취하면 취할수록 더욱 더 원한다는 것을.
타오르는 이 마음을 어떻게든 감추고서, 그녀의 옆에서 나란히 걸어간다.
"이번 회의가 끝나고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아직도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았다.
"무슨 이야기요?"
그녀가 묻는다.
"여제님을 뵙는 것이 꽤 오랜만이라고 생각되어서...그저 그 뿐입니다. 시간이 나지 않거나 원하시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겠지요."
나는 여제가 거절하지 않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원한다고 해도 여제라는 입장이라서 그런 시간이 없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여제가 거절을 한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거스를 수도 없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기사였다. 그녀를 언재나 곁에서 지켜주고, 바라봐야 할 빛의 기사단장.
단지, 그것밖엔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번에 에레브로 돌아오기 전, 이미 결심을 굳혔다.
수 많은 생각을 뒤로 하고도, 지금이라도 몇 번이나 생각이 바뀌고 있었지만 그만한 각오가 되어있었다.
"그럼, 회의가 끝나고, 기다릴께요."
여제는 내 귀에 대고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의 기쁜 듯한 목소리가, 부드러운 숨결이 무심히 느껴졌다. 고작 귓속말 하나에 온 몸이 저릿해졌다.
'흔해빠진 연정의 마음에 지금 덫을 놓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여제는 모르는 나의 본심. 처음 만난 그 날부터 지금까지 숨겨온 그것은 곧 그녀에게 덫을 놓게 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런 의심없이 덫에 걸려버렸다.
에레브의 정기회의는 순조롭게 끝났다. 그리고 때가 되었다. 여제가 기다리는 곳으로 그녀의 거처로 향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손에 쥔 비약을 다시 한 번 더 바라보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나인하트가 보였다.
"여기서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냉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제의 책사로 누구보다도 공과사를 구분할 줄 아는 남자였다.
여제님을 여제로서 대하는 존재였다. 나와 같지만 어딘가 달랐다. 그건, 내가 여제님을 감히 연모한다는 것인가. 여제로 모시고 있는 기사로서 해선 안 되는 감정이었다.
그렇지만, 여제님은 나에게 있어서 사랑스러운 소녀였기에.
여제를 지키기 위한 기사는 가끔씩, 그저 사랑스런 소녀를 지키는 남자가 되어버릴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인하트는 그것을 알아채고 최대한 배제할 수 있도록 여제의 곁에서 떨어져서 하는 임무를 주었다.
이번에도 그에게 이번 일을 들키게 된다면, 전처럼 임무나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직위를 박탈하고, 에레브에서 추방시킬 것이 분명했기에
나는 침을 삼켰다.
"여제님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만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서 사적인 대화를 하고 싶어서 허락을 구했습니다."
그렇게 변명을 했다. 그렇지만, 확실히 대화를 나누긴 하니 거짓말은 하지 않은 것이다.
단지, 말하지 않은 것이 있을 뿐.
"...알겠습니다. 다만, 도가 지나치면 안됩니다. 항상 말했듯 여제님은 여제니까요. 사사로운 감정은 여제님을 오히려 곤란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지금은 전쟁 중이라는 걸 잊지 말아주세요. 검은 마법사가 이미 부활했습니다."
나인하트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럭저럭 잘 넘어간 듯 보였다. 겨우 다시 결심이 서서, 손에 든 비약을 마시고 나서 나는 더 이상, 문 앞에서 들어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미하일."
여제는 미소를 지으며 언재나의 목소리로 맞이했다.
"여제님, 제가 없을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최대한 동요없이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네. 그렇지만, 미하일이 없어서 조금은 허전했었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늦게 돌아온 것 같습니다."
"미하일, 그게 아니라..."
여제는 한숨을 쉬는 것 같았다.
"저는 그냥 미하일이 보고 싶었어요. 늦게 오셨든, 일찍 오셨든 상관없이요. 언제나 제 옆을 지키는 당신이니까요."
점점 시간이 흘러갔다. 슬슬, 비약을 마신 효과가 오는 듯 했다.
사랑의 묘약.
이번에 에레브로 돌아가기 전, 팬텀이 비약을 주었다. 그리고 효과를 말해 주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사랑을 고백할 때에 쓰이는 최후의 비약이다.'
"왜 이런 것을 저에게 주시는 겁니까?"
'답답하거든. 옛날에 사랑고백 못한 어떤 멍청이가 떠올랐어. 그 때의 상황도 딱 이랬지. 전쟁이 일어나는 시기에 두 사람은 우연히 만나게 되어 점점 사랑에 빠지다가, 한심하게도 고백 하기 전에 결국 어느 한 쪽이 죽었어. 그래서, 다른 한 쪽은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을거다.'
"...그렇군요."
팬텀이 나에게 누구의 이야기를 들려준 것인지, 그저 내가 고백할 결심을 하게 하려고 지어낸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것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저를 좋아하십니까? 저는..."
말도 안 되게 지금껏 감춰온 마음이 허무하게 보여진다.
"저는 여제님이...아니 시그너스님이 정말 좋습니다. 기사인 제가 이러면 안 된다는 것도, 여제님의 위치도, 지금의 현 상황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당신을 곤란하게 만들어도, 이번에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시그너스님이 저에게 이름을 주신 날부터 쭉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여제가 아닌 단지 한 명의 소녀로."
팬텀이 준 비약의 효과를 내심 감탄했다. 대체 무슨 마법약인건지 평생을 안고 갈 비밀을 이렇게나 쉽게 입 밖에 나오게 할 줄이야.
"미하일, 전......안 될 것 같아요."
여제님의 대답은 언제나 예상했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직접 이렇게 들어보니 그건 예상하지 못한 정도로 씁쓸했다.
"여제님, 그래도 전......!"
"언제나 여제님을 위하여 살겠습니다. 부디 괜찮으시다면, 기사로서 당신을 평생 지키는 삶이라도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는 더 이상 여제에 곁에 있기엔 무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이러한 나의 부탁조차 여제에겐 상당히 무리가 있는 것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내 삶엔 여제님이 전부가 되어버려서, 만약, 에레브에서 추방되어 그녀의 기사가 아니게 된다면 그때는 다시 여제님이 오기 전에 이름도 없던 빛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인가.
그렇게 되어, 자신의 아버지였던 빛의 기사, 크롬처럼 어둠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안돼요."
여제의 목소리는 어딘가 심지가 굳었다. 여리지만 너무나도 단호한 그녀의 말은 나에게서 빛을 빼앗아가는데는 충분했다.
"여제님, 저는!!"
그렇지만, 더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 이상으로 말해버린다면 그것은 무례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감히 여제님의 말씀을 반하는 것이다.
"미하일, 저는......!"
그때에 여제가 거의 동시에 말하셨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당신을 좋아하고 있어요."
여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아까 전, 그 대답들은 무엇인가.
"저, 여제님? 무슨?"
아직도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바보같이 다시 한 번, 묻는 수밖엔 없었다.
"미하일,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여제는 볼을 붉혔다. 아무리 그래도, 전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하지만, 저는 여제입니다. 이건, 제가 직접 선택한 길이예요. 두 번 다시는 평범한 소녀로는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평범하게 서로 사랑한다고 해서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미하일은 나의 기사입니다. 저는 당신이 지켜주기만 하는 여제이고요. 그러니까 저는......."
"언젠가는 그런 관계를 벗어나 사랑에 빠지고 싶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검은 마법사를 물리쳐서 메이플 월드가 평화로워질 때에 제 마음을 받아주시지 않겠습니까?."
여제의 말이 끝났을 때에 그때야 비로소 그녀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혼자만의 허황된 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마지막 순간까지 끝없이 믿을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났다. 하지만, 아직 비약의 효과는 남아있었던 모양이었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고백을 한 그녀를 보는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이번 한 번, 먼저 당신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것을 용서해주세요."
아직도 약에 취해 있던 것 같다. 부끄러워 그녀가 좋아하는 화염초처럼 붉히는 그녀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며 점점 거리를 좁혀갔다.
그리고 맞닿았다.
조심스럽게 하면서, 대담하게
부드럽게 하면서, 거칠게
여제...아니 시그너스 님에게 입을 맞추었다. 이상하게도 그녀도 싫어하지 않은 듯 했다.
다시 멀어졌을 때에
그녀는 다시 다가와
'나의 기사, 미하일. 사랑해요.'
그렇게 속삭였다. 그 목소리에 다시 취한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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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 미하일은 둔합니다.를 전제합니다.ㅋㅋ
어째서인지, 미하일만 모르는 연애감정. 혼자서 짝사랑 중이라고 남들은 그거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다들 그런 미하일 보면서 한숨 쉬거나 놀리고 있습니다.ㅎ
애초에, 너무 여제빠니까 티 안 내려고 해도 행동과 말만 몇 마디해도 다들 '이놈은 진성 여제빠;;;;;'라고 생각할 듯.
여기서 나온 등장인물 외전 짧게 씁니다.
나인하트 편
(사실, 미하일과 대화하고 다른 곳 가는 척하면서 몰래 미하시그 보고 있음)
나인하트: 제가 그래서 도를 지나치면 안 된다고 말했는데, 점점 넘어갈 것 같군요.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데. 미하일은 갑자기 사랑고백 타령하고 있으니......
작품 끝부분(미하시그 입맞춤보고 나서)
나인하트: 정말 보고만 있자니, 안되겠습니다.감히 여제님과 입을...!! 다음 번 임무는 에레브에서 가장 멀리떨어지고 가장 힘든 곳으로 배정이군요. 그리고 감봉입니다. 아예 무보수로 해야겠군요.
나인하트: 그리고 대체 부추긴 건 누굽니까!!!!!
괴도 팬텀 편 <제목의 이유>
(작품 시작 전)
팬텀: 여제를 사랑하는 빛의 기사라는 건가. 보고만 있자니 답답하네. 딱 보면 모르는건가? 본인이 그렇게 대놓고 표현하는데 시그너스가 눈치채지 않을리가 없잖아!
팬텀: 저대로 놔두다간 계속 저 상태겠지...그럼 시그너스가 불쌍하지. 성미엔 안 맞지만, 조금 도와줘볼까?
(미하일 만남)
팬텀: 저건 진짜다! 진짜가 나타났다!! 저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중증의 여제덕후다!!
(사랑의 묘약 주고나서 떠남)
팬텀:ㅋㅋㅋ사랑의 묘약을 진짜로 믿을 줄이야...한 치의 의심없이ㅋㅋㅋ저거ㅋㅋ그냥 빨간 hp 포션인데ㅋ
(미하시그 훔쳐보는 중)
팬텀: ㅋㅋㅋㅋㅋ대단하네. 위약효과라는 건. 효과가 제대로네.ㅋ
<웃을 거 다 웃고, 진지하게 생각 중>
팬텀: 부럽네. 여제와 기사라......뭔가, 정석이네. 여제와 괴도가 정말 특이한 건지도 모르지. 아리아...마지막까지 제대로 내마음을 전하지 못해서 미안. 정말로 멍청한 건 나니까. 좀 더 일찍 눈치챘다면, 이렇게 후회하는 일은 없었겠지...
아직도, 너를 이렇게나 사랑하고 있는데...
들어줄 너가 없어.
시그너스 편<외전>
시그너스: 미하일이 드디어 결심한 모양이네요. 다행이네요. 우선, 나인하트에게만 살짝 말해볼까요? 나중에라도 걸리면 미하일은 정말 곤란할 거니까요. 그래도 봐주지 않을텐데...괜찮을까요?
그렇지만 저는 이 순간만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제야 겨우 말할 수 있겠군요.
미하일, 당신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