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숨은 달 검은 하늘 [은월(隱月)] - 21화
살짝 우중충한 기운이 있는 하늘이었지만 어제 시험을 통과했다는 기쁨을 만끽하며 숨을 들이마시니 그 어느 때보다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고요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이 평화로움이 깨질 듯이 아주 위태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진정한 여우마을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비록 술이 약해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일찍 나와야 했지만 파티까지 열어서 즐겁게 놀았다.
그런데, 마음 깊은 곳부터 서서히 덮쳐오는 이 불안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무언가 걸리는 위화감.
그래, 이것은 마치,
폭풍전야와도 같았다.
그러나 나는 이 생각이 곧 틀렸음을 깨달았다.
폭풍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
지금 이 상황은 어제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는지 자꾸만 되짚어보게끔 만들었다.
어제 분명 시험을 통과하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여우들과 실없는 농담들도 주고 받았다.
하지만 이 분위기는 전혀 어제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었던 사이라는 것을 부정하듯 낯선 이방인을 대하는 특유의 껄끄러운 태도였다.
그제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등골에서부터 온 몸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어유, 나는 그런 줄 몰랐지..."
"그러게 진작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크흠, 흠. 이걸 어쩌나?"
"미안하게 됐어..."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설마 이럴 줄은...."
귓가를 스치는 여러 개의 목소리가 나를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노골적인 웅성거림과 시선에 둔탁하게 머리를 한 대 맞은듯한 충격이 일었고, 곧 정신이 멍해졌다.
어젯밤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도무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으, 은월! 어제 자네가 일찍 돌아간 뒤, 새벽에 집주인이 왔네. 한 번 찾아가 얼굴이나 보게나."
뒤에서 헐레벌떡 뛰어온 듯한 노야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묘하게 시선을 피하고 어쩔 줄 모르는 듯한 노야의 태도에 자연스럽게 이마가 찌푸려졌다.
이 여우들이 단체로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모르겠지만, 좋지 않은 것이라는 건 확실해졌다.
새어나오는 한숨을 뒤로한 채 노야에게 위치를 물었다.
우물쭈물해대는 이들에게 괘씸한 마음이 드는 한편,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까지 만드는 걸까 하고 의아하기도 하고 우리들의 관계가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나 하는 실망감도 같이 들었다.
그리고 믿음을 주지 못한 나도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의 다섯 동료들 빼고는 유일하게 마음을 열었던 상대들인데.
그렇게 착잡한 심정이 되어 걷고 있을 때, 분홍빛의 털이 눈앞에서 살랑거렸다.
"은월, 은월! 몽이 아저씨가 왔어!"
"몽이 아저씨?"
"네 집의 원래 주인. 여기저기 여행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 마을에 잘 없는 아저씨인데, 오늘 새벽 일찍 왔다나 봐!"
"아아, 안 그래도 집 문제로 신세진게 많아서 인사드리러 가는 길이야."
"그래? 마침 널 찾던데 잘 됐다! 같이 가자!"
다른 여우들과는 달리 변함없이 날 대해주는 랑이의 태도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러고보니 이 마을에서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에도 나에게 먼저 다가와 준 것도 랑이, 약해져서 빌빌거리던 내게 선뜻 자신의 정령을 내어준 것도 랑이 였다.
"너한테도 신세진게 많았네. 고마워, 랑."
"응? 뭐라고?"
"아니, 아니야."
낮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보던 랑이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다 왔어. 저기 저 여우가 몽이 아저씨야."
"응, 한 눈에 봐도 알 것 같다. 하하."
랑이가 가리킨 여우는 딱 보기에도 행색이 초라하고 몰골이 말이 아닌 게, 여행자라는 아우라가 풍겼다.
무엇보다 그가 어깨에 걸친 나뭇가지 끝의 보따리는 그가 떠돌이라는 것을 확실히 해 주었다.
"몽이 아저씨!"
"엇, 랑이냐? 많이 컸구나, 이 녀석."
"여기 아저씨 집에 사는 여우예요!"
"오오, 반갑다. 네가 은월이구나? 흠, 랑아, 잠시..."
"칫, 알았어요."
몽이 눈치를 주자 랑이 투덜대면서도 재빠르게 자리를 피해주었다.
랑이 멀리 있는 걸 확인한 뒤 몽이가 특유의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너, '인간'이지?"
".......!!"
"랑이는 아직 못 들은 것 같다만, 어제 새벽 늦게까지 파티를 벌이던 여우들에게는 내가 말했어. 이번 여행은 차원이동을 해서 많은 종족들을 만나보고 왔거든."
아, 그런거였나.
오늘 아침 여우들의 태도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 하하, 오해가 풀린 것을 좋아해야 하는 건가.
'아니, 전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곳에 내 자리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고, 언젠가는 떠나며 사실이 밝혀지리란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
모든 것을 해결한 뒤, 당당히 돌아와 웃으며 내가 사실 여우가 아니었노라고, 그러나 이제 여우로 살겠노라고 말하려 했었는데.
실망감과 서운한 감정이 들자, 살짝 삐뚤어진 생각도 들었다.
'이 여우들이...! 내가 말 할 때는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
새삼 밀려오는 괘씸함에 쓴웃음을 지으며 서 있자, 미안한 마음에 귀와 꼬리를 축 늘어뜨린 떠돌이 여우가 말했다.
"들어보니 너와 인간의 특성이 일치해서, 설마하는 마음에 말한 것이... 미안하다."
"..... 괜찮습니다."
"후우.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내가 그쪽으로 가는 이동 스크롤이 있는데 네가 말만하면 하나 줄게. 아, 물론 이쪽으로 되돌아 올 수 있는 스크롤도 한 두장 정도 주고."
".......!"
심장이 빨리 뛰었다.
이제 말 한 마디만 하면 다시 메이플월드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다시 동료들에게로, 다시...!
하지만 지금 떠난다면 언제 다시 오게 될 지 모른다.
최대한 빨리 오겠지만, 무슨 일이 생길 지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몽이가 깊이 고민하는 나의 어깨를 툭 가볍게 두들겨주며 지나갔다.
"한동안 여행할 생각은 없으니까, 천천히 생각해보고 결정해."
멀리 있던 랑이와 눈이 마주쳤다.
내게로 다가온 랑이가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지만, 본능이 가면 안 된다고 이빨을 세웠지만 재촉이는 의무와 책임에 의해 머릿속은 빨리 모든 것을 끝내고 편히 돌아오길 원했다.
"랑, 여우들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겠어."
***
"그래, 결정한거야?"
"...... 네."
"뭐, 후회되면 다시 이 스크롤로 돌아오고."
"네."
"그럼."
짧은 한 마디와 함께 몽이의 몸이 희뿌옇게 변했다.
아니, 시야의 모든 것이 일렁거렸으니 내가 흐려지는 걸지도 모른다.
살풋 새어나오는 기대감과 슬픔이 섞인 미소를 그리며 마지막으로 둘러보았다.
우는 듯한 랑의 슬픈 얼굴이 흐려졌다.
마지막으로 달이 두개가 뜨는 저 기묘한 하늘을 바라보고 눈을 감았다.
나는 그때서야 일렁거리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 이 장면, 어딘가 익숙하다 했더니.
씁쓸한 웃음을 타고 눈물이 한 줄기 흘렀다.
블랙매지션j
2016.02.23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