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盡人事待天命
그날은 정말 더운 여름날이었다.
간단히 먹을거리를 사러 시장에 나갔다. 시장에는 여느 때보다 더 많은 수군거림이 돌아다녔다. 베일에 쌓여온 새 여제가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소문을 들은 지 닷새가 되는 날이었다. 기름진 음식은 수련에도 몸매에도 방해가 되는 고로 가장 먼저 과일가게에 들어가 싱싱해 보이는 사과를 하나 골랐다. 그것을 보기 좋게 들고 다른 것들을 잠시 돌아보았다.
“기사단이라니, 당연히 말도 안 되지! 여제가 자기 군사를 부리려는 속셈 아니겠어?”
적절하게 귓속을 긁어대는 것이 제 바깥사람을 괴롭히기에 좋을 것 같은 목소리가 과일을 둘러보며 부르고 있던 콧노래를 덮었다. 며칠 째 시장에는 상인들의 활기찬 고함 소리보다 정신없는 공론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그 시끄러운 소리를 멈추고 싶어 사과 여섯 개를 가판대에 내려놓는 것으로 그녀의 입을 다물게 했다. 계산이 끝남과 동시에 다시 그 작은 가게를 채운 욕지거리를 나는 저녁 장보기를 완전히 마칠 때까지는 계속 들어야만 했다. 사과 하나를 짐 속에서 꺼내 우적우적 씹었다.
제 운명을 가늠하듯 핏빛으로 빛나는 사과가 아주 짧은 순간 미동하더니 여러 조각으로 갈렸다. 처참하게 공중으로 뜬 작은 덩어리들 사이로 날카로운 빛을 내며 날아간 화살이 들판의 풀들 사이로 숨었다. 이윽고 주인에게 발각된 그것은 힘없이 뽑혀 허리춤의 시복으로 들어갔다. 하루 수련의 마지막을 알리는 1000번째 명중이었다.
‘오늘은 이상하게 더 피곤하네…….’
덜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나무문이 닫혔다, 활과 화살을 가볍게 던져놓은 나는 빠르게 옷을 벗고 몸을 적셨다. 끈적거리게 흐르던 땀을 잡아내며 몸 구석구석을 휘젓는 목욕물의 느낌이 좋았다. 잠시 감아두었던 눈을 뜨며 긴 숨을 내쉬고 나니 그날 하루 동안의 일이 수증기와 함께 공중으로 떠올라 욕실 안을 채웠다.
‘에레브로 가야 할까…….’
지금도 내 침실에 있는 오래 전 에레브에 관한 책 한권 때문에, 나는 오래 전부터 그곳에 대한 동경에 비슷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책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내가 아는 에레브의 황제들은 가히 존경할 만한 의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여제의 등장과 그녀의 이름을 딴 기사단의 창설 소식은 나를 흥분시키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날 밤도 소문이 가져온 잡다한 생각 때문에 두 시간여를 잠들지 못하고 더 누워 있어야 했다.
“하아…… 슬럼프인가. 왜 이러지?”
나는 무거운 몸을 끌며 표적을 빗기고 멀리 날아가 버린 화살을 찾아 나섰다. 곧잘 해내던 1000번째 명중에 도달하는 것이 그날 들어 더욱 쉽지가 않았다. 들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시선과 함께 나는 화살이 향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탁 트인 넓은 들판에서 반드시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는 화살을 찾지 못한 나는 그새 붉어지려는 하늘을 보며 미간을 폈다. 얼마 남지 않은 저녁거리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며 나는 몸을 돌렸다.
“이것을 찾고 계신 겁니까?”
인근의 풀숲 뒤에서 숨기고 있던 몸을 드러낸 사내가 내 화살을 한 손에 든 채 말을 건넸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흰 피부의 사내였다. 그가 몇 발자국 앞으로 다가오자 이번엔 한 소녀가 나와 사뿐거리며 사내를 따라왔다.
“맞습니다만, 누구시죠?”
사내를 보고 세웠던 경계심을 여린 소녀를 보며 내려놓은 나는 바로 앞의 들풀을 밟으며 되물었다.
“지나가다 화살에 맞을 뻔한 나그네 정도라고 해두죠.”
“이런, 죄송합니다. 사람이 지나다니는 곳은 아니라서요,”
“수련 중이었습니까?”
화살을 건네준 그는 내 행색을 위아래로 훑고는 다시 물었다.
“보시다시피요.”
“꽤나 멀리서 날아오던데, 도대체 얼마나 막 쏘셨으면 화살이 그렇게 엇나간 겁니까?”
“하아?”
내 미간에 다시 주름이 잡혔다.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그 사내의 첫인상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화살이 날아오는 속도와 각도를 대충 보니 꽤 높이 올라갔다 내려온 모양이더군요. 활 쏘신다는 분이 그렇게 막 쏴서야 언제 실력이 늘겠습니까?”
“어이가 없네요. 그쪽은 헬레나님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보죠?”
“쏘진 못해도 아는 건 당신보다 많을 겁니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기가 차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수련만 하다 심심해진 일상에 나쁘지 않은 이벤트겠지만, 그 사람과 계속 말을 섞다간 수련을 두 배로 하는 것 만한 피로가 몰려올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와 사내의 대화를 지켜보던 소녀가 그의 팔을 쿡쿡 찌르며 작게 무언가를 말했다.
"네? 하지만 이 자는 말단 기사라도 시키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른 자를 찾아보심이…….“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분을 더럽힐 말만 잘도 골라서 들려오는 듯했다. 그의 턱주가리를 날려주고 싶어 오른쪽 주먹을 꽉 쥐었다.
“용건이 없다면 이만 돌아가도 되겠죠?”
두 사람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 하자 이번엔 소녀의 한마디가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만요!”
풀숲을 짓밟는 소리가 다시 멈췄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당신이 수련하는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무슨…….”
앞에 차를 놓고 고심하더라도 모자를 주제를 처음 보는 소녀에게서 들은 나는 어지간히 당황한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잊고 있었던 이유에 대한 생각을 하려던 나는 얼마 전 들을 소문 때문에 벌려놓은 생각들을 엉뚱하게도 그때 정리해 버리고는 귀찮은 듯 입을 열었다.
“시그너스 기사단에 들어가려고요.”
사내의 한쪽 눈이 살짝 움직였다. 소녀는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웃음을 지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았지만, 그때는 그녀를 이상한 소녀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 실력으로 가능할지 모르겠군요. 흐음…….”
그가 또다시 입을 놀렸다.
“입 안 다물면 쏴버릴 거예요.”
“안 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보아하니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겠군요.”
소녀와 마찬가지로 영문을 몰랐던 나는 역시 그를 정신이상자쯤으로 취급해 버렸다. 이젠 정말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건네야 할 것 같았다. 어느덧 붉은 하늘이 검푸른 빛으로 변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늦었네요. 여기까지 하죠. 두 번 다시 안 마주쳤으면 좋겠네요.”
“아무쪼록 최선을 다해 주세요. 하늘은 노력하는 자를 저버리지 않는 법이니까요.”
멀어지기 시작하는 여인의 뒷모습을 보며 재수 없는 그 사내는 마지막으로 훈계를 날려 보냈다. 그 사내의 말을 귀담아 들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훗날 내가 에레브로 와서 여제를 찾아갔을 때의 첫 반응이 어땠을지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결국은 그의 말이 맞아 떨어진 셈이다. 다만 그 사내가 내 상관이라는 게 조금은 꺼림칙한 일이기도 하다. 내가 기사가 되기 전 이야기는 이정도로 충분할 것 같다. 보고서 마감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서두르지 않으면 한 줌의 잔소리와 함께 월급 일부가 떨어져 나갈 것이다. 다섯째 항목에서 멈춘 보고서를 나는 계속 이어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