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소설] 오시리아 원정대 <1~3화>

질문자 캐릭터 아이콘폐병걸린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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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유저수211,184

작성 시간2007.09.13

그 일이있는 이후로 벌써 만 1년가량 흘렀네요.

 

그때와는 달리 문체도 많이 바뀌고 글 자체의 분위기도 많이 바뀌어서 솔직히 이 글을 다시 쓰라고 했을때 다시 쓸수 있을지 없었을지도 종잡을수 없습니다만, 그래도 한때 가장 열성적으로 글을 쓰고, 글 쓰는 것 자체에 행복을 느끼던 시절을 떠올리며 올립니다.

 

 

(세달전 제출한 원고(마감일자비좀..;;) 땜시 피뽑는 바람에 이후로 엄청난 슬럼프에 직면했네요 orz..)

 

1년전 글인지라 역시 많이 부족하고, 또 스크롤도 압박입니다만, 그래도 읽으신다면, 부디 즐거위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아참, 차마 인사 못하고 떠난 못난놈 기억하시는 지인분.

 

msn메신저 : ashasstory@naver.com

네이버 블로그 : http://blog.naver.com/ashasstory

 

언제든 들러주신다면 환영환영 ㅠㅠbb

 

그럼 언제나 좋은 하루되시길 빌겠습니다^^

 

 

프롤로그-원로원 회의.


빅토리아력 477년, 바람이 살 풋 미소 짓던 날.

매섭게 몰아치던 칼날 품은 바람이 부드럽게 생명들을 쓰다듬었고, 내리 쬐이는 따스한 햇살에 새하얀 눈밭을 이불 삼아 안식했던 생명들이 싹을 틔웠다. 향기로운 꽃바람, 보드라운 바람결과 따사롭고 평화스런 햇살에 절로 미소 지어지는 오늘은 생각만큼이나 샌드위치라도 싸서 피크닉 가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왁**껄 활기가 넘쳐야 할, 들이요, 강은 한산하기 그지없었고, 심지어 마을 중심부의 도로나 거리에도 공기놀이 하는 아이 하나 없이 썰렁하긴 마찬가지였다. 이젠 당연하게 여겨져 버린, 이런 무색해져버린 삶에 모두 지쳐있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마을의 실력자―대부분 20대 초반에서 50대중반의 남성―라면 너도나도 원로원의 명에 따라 몬스터 퇴치에 여념이 없었는데 자연스레 마을에 남은 이들은 어린아이나 부인들이었고,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혹은 특수사항이 있는 마을 사람들―장애라든가 나이든―이나 이로써 연인 홀로 전장에 보내어 가슴앓이 하는 여편네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마을의 아이들을 보호하고 이틀 내지는 일주일에 한번 노곤해진 몸을 이끌고 돌아오는 그들의 배후자나 자식들의 피로를 풀어주는 것이 전부였으며, 딱한 일없이 무료함을 달래고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마을의 펍에 모여 입을 모아 떠드는 것이 다였다.

근래에 들어 공통으로 입에 올리는 내용은 한달에 한번 개최하는 ‘원로원 회의’였는데 항간에 떠도는 빅토리아 대륙을 일궈낸 4현자와 페어리 퀸 레이나 중 헤네시스를 통괄하는 ‘헬레나 드란 오페나 라이세스’가 아주 획기적인 방안을 공표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브루스 씨는 무엇일 것 같아요?”

풍만한 몸매의 펍의 주인인 밍밍 부인이 묻자 허둥대던 박사 브루스 씨가 안경을 바로 쓰며 잠시 생각하는 듯싶더니 곧 입을 열었다.

“저… 그러니까.”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자 브루스 씨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안 그래도 소심한 브루스 씨는 괜스레 안경만 버벅 대었고, 끝끝내 모두의 찌르는 듯한 시선에 못 이겨 힘겹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모르겠는데요?”

이래, 조그마한 땅덩이에 불과한 빅토리아 대륙 시민들의 무한한 관심과 환호 속에 치러진 원로원 회의는 현재 경악에 휩싸였다. 한달에 한번 각 마을의 안위와 추진할 계획 결정, 여론을 수렴하는 등 빅토리아 대륙의 정치 원동력이 되는 원로원의 회의장은 빅토리아 대륙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총 12명으로 구성된 원로원 위원들은 모두 빅토리아 역사서에 한번 쯤 이름이나 명성을 떨쳤거나 그에 버금가는 연륜 있는 학자들이 대부분의 관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대체적으로 대위원장이 중앙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회의를 이끌어가지만 이번엔 달랐다.

헬레나, 그녀가 나선 것이다.

…하여, 함으로, 그로써, 합니다.

그녀의 눈은 손에 들려진 서류와 원로원들의 눈높이를 오갔다.

…하기 때문에, 이거니와, 으로, 하여금, 해야만 합니다.

고동나무를 베어다 만든 의자와 테이블, 그리고 그 나무 자체를 써 만든 회의장은 자연의 향기가 묻어났다. 드워프가 만든 만큼이나 정교하고 아름다운 이곳은 스며든 햇살에 무척 고아하고 화사해 보였다. 그리고 그 햇살만큼이나 포근하고 풋풋해 보이는 헬레나의 샛노란 머리카락이 묘한 매력을 발산하였다.

…그러므로, 이래로, 할 수 있었던,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조용조용한 그녀의 어조에서 묻어나오는 강한 신념과 굳건한 의지는 이것이 예전부터 준비해 온 일임을 짐작케 하였다. 말이 이어 길수록 원로원 위원들의 벌려진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고 탄성하는 그들의 모아진 입에선 감탄사가 끊이질 않았다.

오!, 아!, 그런!, 대단하오!

그럴 때면 헬레나는 작은 미소를 입가에 띠워 보냈고, 반대로 맨 앞자리에 마주보고 앉은 채 석고상처럼 굳어있는 소녀와 소년을 볼 때면 연신 미안하단 눈길을 보내주었다.

계속하여 제시하는 그녀의 서류는 어느새 막장에 다다르고 있었다.

…반면에, 없었기에, 하겠지만, 생각에, 지고지순한, 어쩌면, 때문에, 필요한 상태입니다.

드디어 이야기는 막바지에 이르렀고, 헬레나는 회의장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그녀의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경이로움에 찬 원로원 위원들과 다른 세 현자와 페어리퀸 레이나의 눈망울에 일일이 자기 자신이 서 있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의외로 담담한 검은 머리의 소년에 비해 어쩜 그럴 수 있냐는 듯 울상 짓는 오렌지 빛 머리의 소녀에게 부탁한다는 듯 고개를 한번 까닥하고는 회의장의 정면을 직시했다.

짧은 침묵이 오가고 이윽고 헬레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존경하는 원로원 위원님들, 그리고 존지, 존엄하신 세 현자와 페어리퀸 레이나시여. 따라서 지금 이 자리에서 오시리아 원정대를 선포하는 바입니다!!”

자신이 쟁취하려는 일들이 불러올 빅토리아와 오시리아 대륙 사이의 이변을 전혀 예기치 못한 채.


제 1화 갈등


“후… 후후후… 후후후후…….”

대게 극단에서 매우 악질적인 인물들이 등장할 때마다 나올 법한 소름끼치는 배경음이 내 머릿속에 깔리기 시작했다. 투명한 내 하늘빛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았고 작고 도톰한 붉은 입술은 비뚜름하게 올라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음산하고 무척 악스러운 분위기를 느끼게 만들었다. 이러는 와중에도 나는 평소의 내 모습과 지금의 이 모습이 교묘하게 매치가 된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때 아닌 실소를 터트렸다. 경각에 분위기가 흐트러졌단 생각이 미치자 아차, 한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 냉소적이고 조소적인 웃음소리를 흘리며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 이런 식으로 제 뒤통수를 치실 줄은 몰랐습니다, 헬레나 님.”

아무도 없는 빈 허공에 나 홀로 얘기하자니 적잖아 우스웠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당장에 눈앞에 어른거리는 누구누구를 친히 찾아가 아작 내버릴 것만 같았다. 물론 그 방법과 말속에 담긴 속뜻이 움찔할 정도로 치밀해 보인다는 것이 현실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정말 웃기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뭐라고? 오시리아 원정에 파견하겠다고? 아주 당연하다는 듯 말하던 헬레나 님을 떠올리자 허파에 바람이라도 들어간 듯 자꾸만 헛웃음이 나왔다. 아니, 이전에, 이른 아침에 찾아온 헬레나 님이 오늘 원로원 회의를 자기 혼자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다며 같이 가 달라 부탁 했을 때부터 눈치 챘어야 했다. 아니면 헐레벌떡 준비하고 헬레나 님을 따라 원로원 회의장에 도착했을 당시 잘 부탁한다며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고는 회의장에 들어설 때 무언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껴야만 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회의장에 긴장한 얼굴로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그를 보았을 때나 헬레나 님이 장엄한 설교를 늘여놓았을 때도 ‘이건 무효야!’라고 외치며 돌아설 수 있었던 기회는 많았다. 하지만 ‘설마 아니겠지.’라는 생각과 중간 중간 마주치는 헬레나 님의 눈이 번번이 내 발목을 붙잡았고, 결국 그 상태로 이어진 회의에서 오시리아 원정대를 파견한다는 헬레나 님의 의견이 채택 되어 버린 것이다! 이 얼마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상황인가! 이 어디, 넉살좋게 웃으며 열심히 언덕 위를 올라가고 있던 아기 슬라임이 지나가던 행인1에게 밟혀 압사 당하는 스토리가 있냔 말이다!!

물론 내가 헬레나 님과 두터운 안면이 있는 것도 나와 그가 어린 나이에 소수의 실력자라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아무리 실력과 재능이 뛰어나다 한들 실전과 경험 면에서 연장자와 많은 차이가 난다는 걸 모르시진 않으실 텐데? 거기다 솔직히 실토하자면 내 실력이 평균보다 조금 나을 뿐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나 자신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날 추천하신 것은… 죽으라는 게냐.

하나하나 되짚어보자 안 그래도 치솟았던 분노가 맹렬히 불타올랐다. 있는 힘껏 쥔 주먹을 부르르 떨던 나는 잔뜩 부푼 풍선에 바람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피식, 웃었다. 내 입술사이로는 여전히 시리도록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나오신다면, 저도 다 방법이 있습니다, 헬레나 님.”

마치 악의 화신이라도 된 듯 마냥 전의에 불타오른 나는 다시금 후후, 거리고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게 뭔데?”

…이것은 내가 한 말이 아니었다. 당연히 내 곁은 둥둥 떠다니고 있는 먼지 또한 아니었다. 아무리 내 목소리가 분노에 억양과 톤이 약간 변질되었다고는 하나 아직 앳된 목소리를 지닌 내가 저토록 높고 우아한 목소리를 낼 순 없었다. 게다가 더욱 문제가 된다는 것은, 내가 저 목소리의 주인공을 안다는 것이겠지.

“…헬레나 님.”

그렇다. 그랬던 것이다. 친절하게도 날 지글지글 끊는 악(惡)의 냄비에 넣고 휘휘 저어주신 ‘헬레나 드란 오페나 라이세스’라는 이름을 가진 작자였던 것이다!

회의장 입구에서 팔짱을 끼시고는 지그시 날 바라보는 헬레나 님은 ‘난 아무잘못 없어요~’라는 뜻을 내포한 천상의 미소를 그리고 계셨다. 그 모습에 잠시 툴툴거린 나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내 사악했을 태도를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헬레나 님 앞에선 한없이 약해지는 나였다. 내가 한마디 대꾸도 없이 묵묵히 의자에 앉아 있자 어깨를 한번 으쓱하신 헬레나 님은 싱긋 웃으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 옆자리엔 정**를 검은 그림자가 앉았다. 차분하고 안정감 있는 움직임이었다.

“… 아, 안녕하세요, 린 님?”

왠지 모를 익숙한 느낌에 그 검은 그림자를 향해 고개를 돌려보니 눈이 마주친 그가 어쭙잖게 인사했다.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카락에 위로 쳐올린 뒷머리에 비해 길게 늘어트린 구렛나루가 인상적인 그는 방금 전까지 원로원 회의에서 내 바로 맞은편에 앉았었고, 그 회의로 인해 나와 같은 사명을 띠게 되었으며, 16살, 어린 나이에 5서클 유저에 들어선 내 오랜 친우이자 죽마고우인 선 세바스찬 이었다.

이름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포스가 느껴지는 그는 선(善)이라는 그의 이름보다 악(惡)에 가까운 차림새를 하고 있었는데, 검은 흑발에 섬세한 턱 선과 오뚝 솟은 코, 그 밑에 알맞게 자리한 붉은 입술과 여자보다 더 고아보이는 우유 빛 흰 피부, 그리고 이와 대비되는 선한 눈매 속에 들어찬 흑수정이라도 박아 놓은 듯 맑고 투명한 새까만 두 눈동자는 신비스런 분위기를 자아해 내어 그저 준수함에 그치는 그의 외모는 상대로 하여금 호감을 이끌어 내기엔 충분하였다. 물론 자신이 어둠의 성자라도 되는 것 마냥 칙칙하다면 칙칙한 검은 로브를 입지 않았을 때의 얘기지만 말이다. 제발 딴 옷 좀 입어보라고 그렇게 권했건만 절대 그 옷을 내팽개치지 못하는 그였다. 그도 그렇듯 100년 묵은 고목나무 스태프와 함께 ‘나 마법사요!’라는 팻말을 온 몸에 써 붙이고 다니는 그의 말로는 마법사로써 당연한 의무이자 도리라나, 뭐라나. 허참, 되먹지도 않은 말도 다 있다.

여하튼 평소에 길이라도 가다 마주쳤다면 온갖 방정을 떨며 반가움을 표하겠지만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그저 독촉하는 눈초리만 쏘아 붙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듯한 그에게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느낀 나는 입맛을 다시며 헬레나 님께 시선을 돌렸다. 생명의 기운이 가득 들어찬 무한한 숲을 축소해 놓은 듯한 아름다운 짙은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마주쳤고, 동시에 입을 열었다.

“헬레나 님.”

나는 조용히 헬레나 님을 불렀다. 헬레나 님은 계속 해보라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이 가질 않아요. 제가 헬레나 님과 개인적 친분이 두터운 건 사실입니다만, 이런 공적인 일에까지 그런 사사로운 감정들을 운운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아직 그런 중대한 임무를 떠맡기엔 오래된 고병보다 실력이 한없이 부족할 뿐더러, 작은 소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약배한 어린 소녀에 지나질 않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돌아올 2월에 성년이 되지.”

이어진 헬레나 님의 말에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저 말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나, 그것은 나에게 별 감흥 없는 수식어에 불과했다. 나는 지금도 혼자다. 생각이 그곳에까지 미치자 나는 생각하기 싫은 옛 과거를 회상한 사람처럼 미어질 듯 북받치는 울분에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차마 억누르지 못한 감정은 비굴함과 원통함으로 뒤바뀌어 머릿속이 뒤숭숭해졌다. 나는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쾅!!

테이블 위에 있던 컵 안의 물이 그 반동으로 쓰러지면서 고동나무 테이블을 짙은 고동색으로 물들였다.

“되 먹잖은 언어유희는 집어치우세요! 지금 이렇게 둘러 앉아 말장난을 나누자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헬레나 님의 취지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세 살배기 꼬마가 어느 노련한 검사에게 떵떵거리며, 한수 가르쳐준다고 말하는 것과 같단 말입니다! 저에겐 너무 과분한 임무에요! 아시겠어요? 분수도 모르고 설치는 꼴이라고요.”

헬레나 님은 눈을 내리깔며 가볍게 고개를 내 저었다. 그 사사롭지 않은 반응에 오히려 내 화가 난 나는 무턱대고 소리쳤다.

“그렇게 나오신 다면 저도 다 생각이 있습니다.”

나는 씩씩대며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다 바라본 헬레나 님의 눈은 여전히 맑았다. 미미한 흔들림 하나 없이, 티끌의 흑(黑)조차 없이, 헬레나 님의 눈은 여전히 맑았다. 그리고 나는 그 눈을 보며 한층 누그러트려진 어조로, 허나 단호하게 말했다.

“전 가지 않겠어요.”



[…따라서, 지금 이 자리에서 오시리아 원정대를 선포하는 바입니다!]

곱씹어도, 되씹어도, 되새기고, 또 되뇌어도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그 말에 눈에 겨자를 묻힌 듯 눈시울이 시큰 거렸다. 감동 먹었냐고? 그런 의문을 품는 자는 내게 선전 포고를 내리는 것으로 알아듣겠다. 넘어져 징징거리는 꼬마에 깔깔대는 소녀들, 심지어 푸드덕 날아오르며 날개 짓 하는 새들마저 거슬리는 가운데 나는 정말 울고 싶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날 이리도 궁지로 매몰차게 몰아넣은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으아악!! 그래도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다고!”

집에 도착한 이래로 줄곧 배게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나는 답답한 마음에 이불을 걷어내고 한동안 침대위에서 발버둥 쳤다. 누구를 위한 분노인지 한번 노한 나의 기세는 꺾일 줄을 몰랐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우당탕탕!!

그대로 침대에서 곤두박질친 나는 그대로 나무향이 나는 바닥과 다정한 키스를 나눈 것이다. 두 말 안하고 대(大)자로 떨어진 나는 떨어질 때 억눌려 얼얼해진 코와 이마가 문질렀다. 눈물이 찔끔 났지만 머릿속으로 참을 인(忍)을 새겨 넣으며 간신히 참아내었다. 그러나 일어날 생각은 하지 않고, 제풀에 지친 나는 맨바닥에 드러누웠다.

한 팔로 이마를 누른 나는 봄이 되어 부쩍 달아오른 기온에 땀을 흘렸고, 이내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그 땀이 식어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들은 제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아요.’

헬레나 님을 보며 설교조로 외치던 말이 순간 뇌리를 스쳤다.

담담한 표정에 무(無)의 감정을 드러낸 헬레나 님이 나,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화해와 타협을 권했던 것을 나의 완둔함이 이를 거절하고 고래고래 소리친 일이 연이어 떠올랐다.

‘듣고 싶지 않아요! 욕하려면 그냥 해버리란 말이야. 뒤 수군거림 듣고 싶지 않으니까!’

‘린 님!’

선이가 경고하는 어조로 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요, 나, 거절할 수 없다는 거 알아. 그런데 지금 이러시는 거, 반(反)못하는 나, 조롱하는 걸로 밖에 안보여!’

헬레나 님의 눈동자가 요동치는 것이 얼핏 보였다. 한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마음의 평정을 되찾은 나는 또박또박한 말투로 이리 말했었다.

‘제 뜻은 앞으로도, 그 후에도 변함없을 겁니다. 늦기 전에 다른 이를 구하시는 게 심상에 이로우실 겁니다. 이번엔 저와 달리 희생정신이 투철하신 분이 좋겠군요. 아님, 드래곤 슬레이어 같이 목숨 아까운줄 모르는 몽상가도 괜찮겠네요. 이번 회의로 많이 노곤하실 텐데 시간 빼앗아 죄송합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 붙잡으려던 선이에게 당부했다.

‘따라오지 않는 것이 너나 나를 위한 길일거야.’

뒤조차 돌아** 않았다. 헤네시스 귀환 스크롤을 찢음과 동시에 헤네시스에 당돌한 뒤 어쨌냐며 묻는 마을 사람들―특히 브루스 씨의 표정이 어두웠던 것 같다―을 뒤로 한 채 곧장 집으로 돌아와 이렇듯 방에 처박혀 있는 것이다. 다른 건 없었다. 그저 자신의 감정조차 다스리지 못하는 나의 한심함이 자초한 일이었다.

“화… 많이 났겠지? 아니, 안 났다는 게 더 이상하지.”

슬쩍 그들이 나에게 실망하며,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니 무언가 심장을 후벼 파는 것처럼 아려왔다. 생각할수록 무기력해지는 기분이었다.

시간의 흐름은 무뎠다. 이렇게까지 하루가 길었었나, 근래엔 임무니 뭐니, 에 열이 달아올라 하루가 열흘인 것 마냥 빨랐던 터라,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혼자’라는 것. ‘외롭다’는 것. 오늘은 무서운 밤을 같이 지세 줄, 기쁨도, 슬픔도 같이 해줄 친우도 없었다. 내일은 돌아오겠지. 그럼 조금은 나아 질 거야. 몸을 옆으로 돌린 나는 점차 초점이 흐려짐을 느꼈다. 무거운 눈꺼풀은 그 문을 닫았고 애써 나 자신을 **하며 이른 잠을 청했다.

짹짹짹.

참새의 지저귐이 들려왔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아침이 되어있었고, 바닥에 이불 한 장 없이 잔 탓인지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온 몸의 뼈마디 들이 아우성쳤다. 어제와 달라진 것이라곤 아침에 에이미가 돌아온 것이 고작이었고, 상황도, 기분도, 어제와 다를 바 없었다.

“그래, 에이미. 나 없는 동안 잘 지냈어?”

분홍빛이 감도는 털로 온몸을 두르고 자그마한 몸집과 귀염성 있는 얼굴을 들이민 소녀는 오랜 시간을 나와 함께 동고동락 해온 에이미 양이었다. 에… 엄밀히 말하자면 긴 꼬리까지 늘어트린 작은 체구의 원숭이지만 말이다.

에이미를 등에 태운 나는 늦은 감 있는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섰고, 그 즉시 생존 능력이 무력해짐을 느꼈다.

이마에 혈관이 삐죽 솟아오름을 느낀 나는 경련이 이는 얼굴로 가까스로 방긋 웃으며 어깨 위에 올라 탄 에이미에게 상큼하게 한마디 해주었다.

“오늘 밥은 없다.”

에이미는 곧 사형 선고라도 받은 사람(?)처럼 아연 질색했고, 나는 두 손을 거두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왜 몰랐을까! 그러고 보니 어제 단 한 끼도 먹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임무를 마치고 어제 이른 새벽에 겨우 집에 들어와 바로 침대에 누웠고, 그 후, 몇 시간도 안돼어 헬레나 님이 나를 원로원 회의장으로 끌고 간 것 또한 생각났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나는 약 2주일 동안이나 부엌에 들어올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건 좀 너무 하지 않은가? 접시 몇 장은 깨진 채 널 부러져 있고 주방 수도꼭지와 연결된 상수도는 터져 물이 주룩주룩 새고 있었다. 게다가 이 영특한 것이 그릇이란 그릇은 다 꺼내 놓은 것을 보아 매 끼마다 새로운 그릇을 꺼내 먹은 것 같았다. 깔끔 떨기는! 살다 살다 자기가 이젠 인간일 줄 아는 게 아닐 성싶다. 거기다 사료는 있는 데로 뜯어 놓고… 한마디로 이건 아니 올 시다, 였다.

어둠의 성자들이 검은 커튼으로 세상을 뒤엎으려 들 때 즈음 드디어, 간신히 부엌정리를 마친 나는 뽀송뽀송한 수건으로 손의 물기를 제거한 후, 거실 한쪽 구석에 쪼그려 앉아 주변에 암울의 영혼들이 둥둥 떠다닐 만큼 암울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에이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기가 진짜 인간 인줄 아나! 한숨을 푸욱, 내쉰 나는 이마를 짚으며 포기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후우, 졌다, 졌어. 밥줄께.”

난 내말의 끝에 이어진 에이미의 행동을 보며 내가 그녀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감안해야만 했다. 바로 표정이 풀리더니 잠시 동안 내 품에 안겨 애교를 떨고는 부엌으로 쪼르르 달려가 언제 알아냈는지 숨겨진 자신의 저녁밥을 찾아 먹었는데, 드문드문 피식대는 비웃음담긴 표정을 지어보였으니까 말이다.

이렇듯 납덩이같은 몸뚱이와 더불어 훌쩍 지나가 버린 시간과 함께 간단한 저녁식사를 마친 나는 한가로이 탁자 앞에 앉았다. 곧이어 약속했다는 듯 해가지고 어둠의 성자들이 온 세상을 까맣게 물들였다. 에이미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마냥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더니 내가 살포시 대준 쿠션에 곧바로 파묻혀 잠이 들었다. 나는 그 앙증맞은 모습에 에이미의 콧등을 살짝 튕겨준 다음 내 방으로 들어갔다. 촛불을 켜고 책장위에 꽂힌 책 한권을 꺼내 대충 훑다 폭신한 침대에 널 부러졌다. 일주일 후 라 했던 가. 오시리아 원정대가 파견되는 시일이.

피식.

당치도 않은 일. 난 저 아름다운 별빛과 추억 깃든 저 숲이 있는 한 이 곳을 떠나지 않아. 여긴 내 집이야.



하루,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났다. 원정대 파견 일까지 나흘 남짓 남았을 뿐이었고, 그 수만큼 나에겐 뜻하지 않은 휴식기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급작스럽게 주어진 시간이니 만큼 활용하기가 여간 골 썩히는 게 아니었다. 하는 일이라곤 책―대부분 소설이나 잡지책―을 읽거나 에이미와 방바닥을 뒹굴며 며칠 전의 나였다면 할 수 없었을, 차라리 이 시간에 몬스터들을 구타하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이 100배, 1000배는 낫다고 팔자 좋은 생각 중이니 이만하면 할말 다하지 않았겠는가. 또 밖을 나돌다 잘못하여 헬레나 님이나 선이와 마주쳐도 그 나름 데로 큰 낭패이니 나에게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은 자연히 집 안으로 제한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처사였다.

그렇게 삼일 동안 집안에 틀어 박혀 마을에 코빼기도 안비치자 슬슬 걱정되었는지 낮에는 깡마른 루나 씨가 차 한 잔하다 갔고, 저녁 때 즈음에는 모든 마을 남자들의 선망의 대상인 리나 언니가 갓 구운 빵을 들고 찾아와 식기 전에 먹으라며 주고 갔다. 덕분에 그날 저녁은 질리다 못해 쳐다보기도 싫은 마른 건량과 육포를 뒤로한 채 간만에 따뜻한 수프와 함께 식사다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마침내 이 지루하고도 무료한 일상을 벗어나고자 가벼운 산책이라도 할 겸 에이미와 빅토리아 대륙의 4대 마을을 둘러보기로 한 건 또 다시 하루가 지난, 즉 원정대 파견 일까지 단 삼일 정도 남은 시점이었다. 피할 수 없담, 즐기자는 심드렁한 심보였다. 뭐, 행여나 운이 나빠 헬레나 님이나 선이와 마주쳤을 시에 어떠한 상황이 일어날지 장담 못하지만.

간단한 복장―청색 칠 부 바지에 흰 반팔 티와 갈색 가죽 재킷―에 적은 여비를 챙긴 나는 잠만은 내 이름으로 전제 특허(?) 낸 일명 찰거머리 작전을 써, 지인들의 집에 빌붙겠다는 굳은 신념 하에 모포 따윈 챙기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집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는 것으로 결코 가볍지 않을 산책 준비를 마친 나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내 어깨 위에 자리 잡은 에이미에게 한번 윙크했다.

“이제 슬슬 가볼까요, 에이미 양?”

“끼익!”

에이미는 다부지게 대답했고, 빙그레 웃은 나는 주머니에서 남색의 마을 귀환 스크롤을 꺼내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것을 반으로 쭈욱 찢었다. 그래도 비싼 건데…….

찌이익!!

방금 전까지 종이였던 스크롤이 가루가 되어 스르르 사라지는 듯싶더니 둥그런 빛의 포박이 나타나 나와 에이미를 감싸 안았다. 항상 이 스크롤을 사용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나는 울렁증 느껴지는 이 느낌이 싫다. 가만히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역행하듯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나의 뒤 배경들을 강제로 끌어당기는 느낌! 수많은 공간을 방황하는 묘한 기분! 생각만큼 자주 애용하고 싶은 스크롤은 아니었다. 그 무엇보다 이동한 직후 근처 나무라도 붙잡고 뱃속에 있는 걸 한번은 꼭 엎어주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 이상야릇한 충돌에 사로잡히니까 말이다. 이젠 그럭저럭 면역력이 생기고 있는 추세지만, 아무래도 영 내키지가 않는단 말이야.(생각해보라, 하루에도 수차례 그 속 니글거리는 귀환 스크롤로 동해 번쩍 서해 번쩍 해야 하는데 안 생기면 그게 인간이더냐? 앙?)

쓩―타닥.

빛의 포박이 걷히면서 커닝시티에 안전히 착지한 나는 한손으론 얼굴에 그늘을 만들고 한손은 허리에 살짝 얹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

커닝시티의 외곽을 눈 안에 담는 순간 멈칫하여 몸이 경직 되었다.

“이봐! 정신 차려! 여보 게나!! 이 사람을 빨리 프리스트 님께 데려가!”

“이쪽이야! **… 몬스터한테 다릴 하나 잃었어! **! 조금만 더 참아! 붕대, 붕대는 어디 있지?”

“여기가 더 급해! 이 여자 습격 당했나봐! 고비라…. …숨을 거뒀어…….”

처음엔 누구나 그렇듯 안 들리던 소리도 조금만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좀 더 경청해서 듣는 다면 모든 들리는 법이다. 그도 그렇듯 나 또한 그런 축에 속했고, 나는 내 눈앞에 펼쳐지는 끔찍한 광경과 긴박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엄청난 공포를 느꼈다. 분명 언제나 같은 풍경에 언제나 같은 불빛이었다. 그러나 확연하게 대비되는 마을 외곽엔 몇몇의 수행 요원들과 민간인들이 섞여 있었는데 타박상부터 시작해서 중상에 심지어 사망까지 척 보기에도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닌 듯싶었다. 의아함에 치맛자락을 붙들고 바삐 달려가는 아주머니께 여쭈니 방금 전 바로 마을 근처까지 몬스터 들이 출몰했었다 하였다.

…잠시 잊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이곳은 헤네시스나 엘리니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렇게 되리라곤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건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미래의 일이라고 애써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설마 이렇게 빠를 줄이야. 물론 내가 부상당한 사람들과 사상자들에 두려움을 느낀 건 아니다. 자그마한 생채기에도 꺅꺅! 거리는 그런 심장 약한 조신하기만 한 숙녀 분들과 동급으로 취급하지 않길 바란다. 이래봬도 임무 수행 도중 동료들이 죽거나 다치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보아왔고, 또 내 손으로 직접 시체를 거둬들이거나 지혈을 한 적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그의 격이 달랐다. 그들은 나에게 있어서 단지 ‘함께 움직이는 자’일 뿐 그 이상의 감정은 없었다. 별다른 감흥이 없다고나 할까? 여하튼 그랬기에 그들의 죽음은 나에게 무덤덤하기만 하였고, 항시 그럴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기에 받아드리기 수월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머릿속이 멍해짐을 느꼈다. 치가 떨리었고, 다리가 풀리는 바람에 그대로 주저 앉아버렸다. 벌려진 입술 사이엔 가쁜 숨이 내쉬어졌고, 나는 떨리는 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간신히 참아내고 있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기억 속의 초콜릿을 녹여 발라 놓은 듯한 진하고 아름다운 저 긴 검은 머리를.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 저 여인은 바로…….

“에이미?”

“끼이익~”

“맞구나! 그럼… 린 누나? 린 누나야?”

“……!!”

줄곧 그 여인을 애도하고 있던 나는 천진한 어린 소년의 목소리에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7살 난 어린 꼬마가 모자를 거꾸로 뒤집어 쓴 채 에이미를 안고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낯익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 이카루스.”

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참을 수 없는 슬픔과 삶에 대한 비정함, 심지어 신에 대한 분노마저 느꼈다. 그세 잘 참아 낸다 싶었던 눈물은 어느새 내 두 뺨을 타고 아침 이슬처럼 한 방울… 두 방울 차례로 흘러내렸다. 그리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날 지켜보는 이카루스를 뒤로한 채 아차! 하는 생각에 앞을 돌아보았지만 다행이 시체는 사람들이 치웠는지 흥건히 고인 피와 굴러다니는 과일이며, 구석이 터져 새어나온 밀가루 등이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간 자취만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누, 누나 왜 그래? 어디 아파?”

그래, 부정하고 싶지만 이것은 사실이었다.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 사람은 이카루스의 하나 뿐인 가족인 이카루스의 어머니였다. 나는 슬픔에 겨워 나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카루스를 두 팔로 꼭 껴 안아주었다. 이카루스는 갑작스런 내 행동에 화들짝 놀란 듯싶었으나 곧 울지 말라는 투로 그 작은 손으로 내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어린 몸짓이 내 품에 쏙 들어왔다. 아직 부모의 품이 그리울 나이 7살. 구름 한점 없이 파란 하늘 위, 햇살이 따스하게 내려앉고, 바람마저 멈춘 듯 숨죽이는 가운데 고약한 심보를 지닌 운명의 신의 장난으로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순진무구한 소년. 이젠 누가 빈자릴 채워 주고 이젠 누가 사랑해 주며 이젠 누가 그를 보듬어줄까? 다만 지저귀는 참새들만이 대답할 뿐. 순간순간 많은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고, 한동안 그렇게 어깨를 들썩였다.

쫓고, 쫓기고, 죽이고, 또 죽이고,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싸움은 도대체 무얼 위한 사투인가. 끊임없는 갈망 속에서 얻어지는 건 오직 죽음뿐. 어찌하여 그간 서로의 상호 관계를 유지하며 균형에 발 맞춰온 그들이 그 균형을 깨고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버린 것일까? 단순한 그들의 이익 때문에? 아님, 우리가 그들의 먹이감이기에? 그것도 아니라면, 이젠 그들이 세계 재패라도 하겠다, 오만을 부리는 것인가! 웃기는 소리. 그 위에 서는 건 항상 우리 인간이다.  

“누, 누나?”

그들의 오색에 팔에 힘이 들어간 모양인지 이카루스가 조심스럽게 날 불렀다. 이카루스의 가쁜 호흡만이 내 귓가를 울리었다. 사람들의 고함소리도, 꺄르륵 거리는 바람소리도, 시계의 초침소리조차 나의 공간 속에 멈춰버린 듯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무거운 침묵 중 나는 나의 목소리를 거두러온 침묵의 사신들이 내 목소리를 앗아가지 않도록 하릴없이 침묵을 깨야만 했다.

그리하여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카루스.”

왠지 오랜만에 그의 이름을 불러보는 느낌이 들었다. 기나긴 여전 끝에 기억 속에 잠재되어온 낯익은 듯 낯선 이름. 오랜만에 눈물을 뽑아 낸 것에 대한 답례일까? 꽤나 머릿속이 맑게 비워진 느낌이었다. 나는 이카루스의 대답이 들리기 전에 넌지시 말을 이어 말했다.

“엄마는 어디 가셨니?”

내가 슬쩍 웃으며 묻자 내 표정을 살피던 이카루스가 금세 헤헤 거렸다. 그리고 내 품을 벗어나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들어올린 이카루스는 그대로 큼지막한 원을 그리며 말했다. 역시 단순하달 까나.

“오늘 이카루스 맛있는 거 이 마~안큼 만들어 준다고 장보러 갔다~ 헤헤. 누나도 같이 먹어.”

장을 보시고 돌아오는 길에 봉변을 당하신 모양이다. …어험, 이렇게 하니 내가 꼭 이카루스를 유도심문 한 것 같잖아! 그런데… 이카루스의 어머니 답 달까. 과연, 마지막 까지 자식 사랑이군요. 나는 새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심장을 누군가 콕콕 찌르는 것은 아픔을 느끼며 침으로 입술을 축였다. 나의 부모님도 그러셨지. 살아가라고, 일어나 두 발로 걸어가라고.

“있잖아, 이카루스.”

나는 똘망똘망한 그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응? 누나 왜?”

한껏 숨을 들이 마신 나는 그새 말라버린 입술을 한 번 더 적셨다.

“오던 길에 이카루스 어머닐 뵈었는데, 급한 볼일이 있으시다며 한동안 못 돌아오실 것 같데.”

이카루스는 잠시 주춤거리더니 주먹을 꼭 쥐며 내게 물어왔다.

“어디 가셨는데? 이카루스 두고 어디 가셨는데?”

이카루스의 얼굴엔 어느새 근심이 주렁주렁 맺혀있었다. 이런류의 질문이 날아 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대답하기 싫은 건 어쩔 수 없는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집게손가락을 펴 위로 향하게 치켜 올렸다.

“저… 저기.”

내 손가락 끝을 따라 멀거니 허공만 두리번거리던 이카루스는 금방이라도 눈물 흘릴 듯한 표정으로 애처롭게 말했다.

“아무것도 없어. 엄마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 하얀색 솜사탕 구름이랑 작은 새 밖에 없어!”

이카루스는 그렇게 악 지르듯 말하다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곧장 내 옷자락을 꼼지락거리는 손으로 붙들었다. 하하, 조금만 더 컸다면 멱살을 쥐어 올렸을려나?

“언제? 언제 오는데? 엄마… 언제와?”

이윽고 눈가에 고였던 눈물이 이카루스의 붉게 상기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보고 있자니 무언가 목에 꽉 막힌 듯 답답하였다. 그것을 억지로 억누르려니 목에 불이라도 지른 것처럼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직감적으로 여기서 또다시 눈물지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최대한 눈에 힘을 주어 눈물 흘리지 않도록 안간힘 썼다. 그때였다.

“어이! 거기, 많이 본 뒤통수!!”

경직.

나는 굳어버렸다. 이카루스의 두 어깨를 쥔 채 살짝 쿵 뒤 돌아보니, 아뿔싸! 저 멀리 대자누님이 서있는 게 아닌가! 뚜렷한 이목구비에 벌꿀을 찍어놓은 듯한 흩날리는 금발 머리. 저렇게 멀리 서도 튀는 외모를 보아 대자누님이 확실했다. 이익! 집에서 퍼져 잘 것이지!

“어이, 오렌지 머리 누님! 나도 좀 **?”

나는 때 아닌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망할! 오지 마, 오지 마! 하필 이럴 때 마주치다니. 가까이 와 내 꼴을 본다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 터이다.

‘무례하구나, 린 에리노!! 감히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시고 위대하시고 존귀하신 이 대자님 앞에서 질질 짜다니! 냐하하하~. 뚝!!’

“…….”

생각만으로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앞에선 이카루스가 훌쩍이고, 뒤에선 절대, Never! 마주치고 싶지 않는 인간 Best 1이 떡하니 날 불러대니 눈이 핑글핑글 돌았다. 그런데 이번엔 우리 선량하시고 아리따우신 랑디르베르―순결한 처녀와 엘프의 하위 신―님의 은총일 까나~. 나에게 구원의 손길이 내려졌다.

“자네! 대자! 뭐하는가!”

투덜대는 대꾸가 뒤를 이었다.

“예, 갑니다, 간 다구요!! 그 놈의 몬스터는 잠도 없나.”

사, 살았다. 뒷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매만지며 뒤돌아서는 대자누님을 보며 난 속으로 환호하고는 이카루스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이미 흘릴 듯 말듯했던 내 눈물방울들은 어디론가 쏙 들어가 버린 지 오래였다. 우씨!

이카루스는 여전히 슬픈 표정이었다. 이로 하여금 나는 다시 우울해졌고, 이카루스의 뺨을 흐르는 눈물 경로를 손가락으로 없애며 말했다.

“울지 마, 이카루스…….”

숨을 허덕이던 이카루스가 물었다.

“엄마, 끄윽, 이카루스 엄마 언제 와? 응? 린 누나는 알지? 그지?”

어떠한 대답을 해야 옳은 것일까. ‘네 어머닌 돌아올 일이 없으시단다. 난폭한 몬스터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콱 물어 갔어든? 오호홋~ 안되었구나, 꼬마야. 밤에 무섭다며 바지나 적시지 말렴.’? 하하하……. 그래도 이건 너무 잔혹하지 않은 가. 한 평생 한 남자만을 바라보고, 한 평생 한 아이만을 위해 살아온 분인데. 정말인지 악독하기 짝이 없다. 운명이라는 게, 하나 뿐인 삶이라는 게……. 너무도 허망하여 무어라 대꾸조차 하지 못한다. 그 무엇보다 혼자 남을 이 아이. 처량하구나. 하지만 그것이 불변의 사실이라면, 그것이 그의 걸음을 저지하게 된다면. 좀 더 훗날에 아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나도 잘은 모르겠는데 말이야. 이카루스가 이 만큼, 아니, 이 만큼 크면 온댔어.”

입술을 잘근 깨 물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이카루스의 머리 위에 손으로 내 키보다 더 큰 투명한 탑을 쌓아 보여주었다. 그러자 이카루스가 눈물 자국과 허연 콧물 자국 묻은 얼굴로 날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끄윽, 윽. 정말…?”

풀썩. 그 덕에 머리에서 떨어진 이카루스의 모자가 땅 위에 내려앉았다. 난 모자에 눌려 까치집이 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애써 미소 지었다.

“응, 그리고 우리 이카루스 뭐하나 맨 날 본댔어. 아마 지금 이카루스가 우는 것도 보고 계실 걸?”

내 말에 이카루스가 황급히 소매로 눈물을 닦으려다 실수로 모자를 밟아 뒤로 벌렁 넘어졌다. 콰당! 그래도 뭐가 그리 좋은지 벌게진 코를 훌쩍이며 실실 웃었다. 요, 귀여운 놈. 에이미, 좀 닮아 봐라. 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흐르려는 이카루스의 코를 닦아 주었다.

“조심해야지. 어디 안 다쳤어?”

걱정스럽게 묻는 내 말 한마디에 이카루스는 꾸역꾸역 눈물을 참는 지 꾹 다문 입이 묘하게 뒤틀렸다. 허나 눈만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 몇 명, 죽어가고, 죽어가고, 또 죽어갈까? 그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과부와 고아가 생겨날까. 고작 마을 하나 지키기 위한 희생이 너무 크지 않는가. 그들에겐 단지 따뜻한 집 한 채와 가족, 그리고 끼니를 때워줄 빵만이 필요할 뿐이다. 너무 불공평하잖아. 어느 누구는 마을에 꽁꽁 틀어박혀 놀고, 먹고, 자고. 그런데 정작 마을의 안위를 위해 전장 터로 간 자들은 생사를 오간다. 자신의 행복을 누려야 할 시간에 어찌 남을 위해 희생해야 하지? 그래, 원로원! 난 처음부터 그곳이 마음에 안 들었어!! 마을만, 오직 마을만 지킬 수 있다면, 소수, 혹은 다수의 생명은 별 가치 없는 것이었어! 그저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식 올리고, 묻고, 아멘. 잡일만 느는 셈이지. (나는 이카루스의 눈을 응시했다.) 그래, 여기서 잔혹한 현실에 좌절하고, 드러누워 시시콜콜한 잡지책을 뒤적이는 건 간단하지만, 그렇게 되면 재미없겠지. 그토록 희생할 목숨이 필요 하다면 나가 싸워주지. 손때 묻은 단검과 표창으로 적의 심장을 단숨에 꿰뚫어주겠어. 하지만 이 소박한 미소를 위해서. 앞으로의 미래가 충만할 어린 자식들을 위해서.

나는 이카루스를 안아 일으켜주며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었다. 그리고 현재 내 마음 속엔 그간 없었던 짙고 뚜렷한 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부디 씩씩하게 자라나기를. 난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미안해서 어쩌지, 이카루스?”

“…응?”

내 뉘앙스에서 풍기는 분위기 때문인지 이카루스는 금세 주눅 들었다.

“방금 생각났는데, 나도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아.”

예상했듯 이카루스의 눈이 빨개지면서 눈물이 고였다.

“응? 누나도 가? 그럼 난 누구랑 놀아? 누가 나랑 장난쳐주지? 알렉스 형아도 넬라 누나도 엄마도 이제 아무도 없는데. 린 누나 가면 누가 나한테 표창 던지는 법도 알려줘? 응? 누나 가지 마, 가지마라.”

나는 단호했고, 이카루스의 눈엔 또 다시 투명한 빗줄기가 흘렀다.

“안돼. 원로원에서 내려진 임무거든. 미안, 이카루스.”

순간 이카루스가 이를 악물고 외쳤다. 그의 목소리가 하도 처절하여 차마 열린 귀론 듣지 못했다.

“그럼, 나, 누나 다시는 안 볼 거야. 가면, 이카루스 두고 가버리면. 나, 누나, 다신 안 볼 거야!!”

이카루스는 소리를 꽥, 지르고는 자기 집으로 냉큼 달려가 버렸다. 뜻밖에 에이미가 그의 뒤를 따랐다.

안 볼 거야… 안 볼 거야… 안 볼 거야……. 이카루스의 그 한마디가 오래토록 내 심장을 파고들었다. 가서 달래줄 수도, 설득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이상은 자기 자신에게 내려진 혼동과 갈등이었다. 더 이상의 참견은 나조차 허락되지 않는 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딛고 일어나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는 없다고……. 훗날 이런 내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을 땐,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이카루스는 성장해 있었다.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여비 챙긴 조그마한 가방에서 헤네시스 귀환 스크롤을 꺼낸 나는 그 주문서를 아무런 감정 없이 쭈욱 찢었고 이래 빛의 포막이 날 감싸 안기 시작했다. 아침과 달라진 점이라곤 오후가 되었다는 것과 어깨가 비어있다는 것뿐이었다.



“…웃기셔요?”

헬레나 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묵묵히 날 바라보시다 어느 순간 고개를 획 돌려 풋, 웃으셨다. 그 행동에 고이 잠들어 있던 십자모양 혈관마크가 관자놀이에 빠직 솟아오름을 느끼며 아찔한 한숨을 내쉬었다.

“…….”

나는 그 화를 참느라 침묵을 유지했고 계속 대놓고 웃으시는 헬레나 님을 보다보다 한마디 하였다. 내말에 가시가 돋친 건 좌우지간 당연한 일이었다.

“…웃으세요. 저도 제가 한심하거든요.”

툭 까고, 뾰로통하게 말하자 헬레나 님이 급히 손을 내저으시며 말씀하셨다.

“풋, 아니, 그게 아니라, 역시 린이는 린이구나 싶어서.”

무언가 믿음이 안가는 대답이군. 나는 반사적으로 물었고 곧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대답이 나에게 주어졌다.

“…칭찬이시죠?”

“아마.”

나는 한쪽 볼을 불만으로 가득 채우며 부풀렸고 반대로 헬레나 님은 이런 날 보며 빙긋 웃으셨다. 고개를 약간 기울인 탓에 헬레나 님의 화사한 샛노란 앞머리가 찰랑거렸다.

이카루스와 헤어진 직후 바로 궁수 교육원을 찾은 나는 언제나처럼 자신의 사서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헬레나 님을 발견할 수 있었다. 헬레나 님은 기꺼이 나의 방문을 환영했고 헬레나 님의 직속 비서인 제이 씨가 차를 내오자 얘기는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형성된 둘만의 공간에서 서로 마주앉아 있자니 적잖아 어색했지만 먼저 죄송하단 말과 함께 다시 원정에 나서겠다는 의사를 또렷하게 밝히자 마치 이 모든 걸 예상했다는 듯 지금처럼 짓궂게 웃으셨다. 물론 이카루스에 대한 이야기는 해봤자 좋을 것 하나 없단 생각에 ‘더 이상 빅토리아 대륙 시민들이 고통 받는 모습을 보기 싫다.’란 정도로 짧게 함축되고 변질되어 입에 올려졌다. **, 결국 내가 만만하셨던 거였다. 그 뒤 오간 대화도 대게 일방적인 대화였고 뭐가 그리 좋으신지 헬레나 님은 방긋방긋 예쁘장한 미소를 그려내기에 바쁘셨다.

“그나저나 만일 제가 가지 않겠다, 했으면 어떻게 하시려 했는데요? 뭐, 이미 한번 거절했지만…….”

순수 호기심에서 시작된 질문의 대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나는 대화가 오가는 통에 옆에 고스란히~ 놓여진 의자라도 들어서 한껏 난동을 부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다시 생각해보라 권했겠지?”

“그래도 안가겠다 했으면요?”

“설득했겠지.”

“…같은 내용이었다면?”

“협박하지.”

“저 대신 간단 분은?”

“없어. 애초부터 대린 구할 생각도 없었고.”

“…죽으란 말씀이시죠?”

헬레나 님은 줄곧 나름 진지하신 얼굴로 간단명료하게 대답하시다 마지막 질문에 배시시 웃으셨다. 쳇, 아주 인생이 즐겁구만?

“아니.”

난 벙쩌진 얼굴로 헬레나 님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음… 역시 인간들 사이에도 엘프라 이건가. 여자인 내가 봐도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섬세히 조각해놓은 듯한 턱 선과 크고 둥근 짙은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작고 도톰한 입술……. 어… 에… 이게 아니라, 어쨌든, 결론은 내가 안 가겠다 뻐겼으면 무산 되었을 얘기란 거잖아!! 이거 여물통에 머리 처박고 기름진 머리 감을 때처럼 짜릿한데? 나는 뚱한 눈빛과 입을 쭝얼쭝얼 거리며 헬레나 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누가 말했다던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계속 실실 웃으시니 뭐라 반박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나는 뭐라 한마디 쏘아줄까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곧 관두었다. 어차피 따져 봤자다. 내 입 밖으로 내뱉은 이상 따져봤자 저렇게 일관 하실 게 뻔하고 무엇보다 나만 피곤하다. 이왕에 결심한거 깔끔하게 가야 보기도 좋지. 나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푹 내쉬다가 창밖에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보며 말했다.

“늦었네요. 이만 가봐야겠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렸고 뜻밖에 내 각막에 비춘 건 처음 보는 화분이었다.

“달맞이꽃이야.”

“달맞이꽃이요?”

내 생각을 간파하신 듯 헬레나 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어정쩡하게 그 말을 다시 되물었다. 헬레나 님은 그 화분을 집게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낭랑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꽃말은 말없는 사랑. 어때, 낭만적이지 않아? 언제고 돌아올 임을 기다리며 말없이, 말없이 그 임을 위해 준비한단다.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이라 할지라도, 끝내 전해지지 않는 사랑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당연 임을 위한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을 희생적인 꽃이지.”

나는, 뭐시라? 희생? 웃기는군. 요즘엔 개나 소나 다 몸뚱아리 넙죽 내놓으면서 ‘갖다 쓰쇼!’하나**? 거기다 말없이 기다리긴 뭘 기다려. 어이구만. 답답도 하셔라, 등의 쓰 잘 떼기 없는 생각을 하며―그래, 시인한다. 누가 내게 낭만을 논하리―언짢게 반론하였다. 

“하지만 그건 어리석은 짓 같은데요? 임과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자기 몸을 깎는 다던가 희생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저라면 어떻게 해서든 제 마음을 전하겠어요. 이루어지지 않든 이루어지든 그건 그 다음의 일이잖아요? 시도도 안 해보고 내내 기다리기만 한다는 건 너무 진부하고 또 지루할 거예요.”

헬레나 님은 내 말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시면 픽, 웃으셨다.

“그렇기도 하겠구나.”

나는 내가 한 말에 내가 감동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가볼게요.”

“원로원 회의 내용은 들었으니 알지?”

헬레나 님의 질문에 나는 간단히 고개만 끄덕였다.

“음… 식사라도 하고 가지 그래? 오랜만에 내가 한상 거하게 차려줄게.”

헬레나 님이 아쉽다는 듯 팔을 걷어붙이시며 말했다. 나는 그 즉시 질겁했다.

지금 나한테 그 푸르팅팅하고 포크를 누르면 뿌직하면서 흐물흐물한 액체가 줄줄 흘러  나올뿐더러 거기다 옵션으로 입 안에 넣는 그 즉시 니오라 병원으로 실려 갈 만큼 기가 막힐 정도로 향긋한 향이 풍겨져 나오는 음식을 먹으라는 거? 그 말은 다시 말해, 지극히 평화로운 이날에 생매장당하란 소리?―한마디로 드럽게 맛없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다 말고 물었다.

“…어떤 대답이 나올 것 같아요?”

헬레나 님은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날아갈 듯 기뻐요?”

“…그 반대에요.”

좀 충격적이었나? 아님, 자신의 요리 실력에 더 잘 아시는 건지 그냥 머쓱 웃어 보일 뿐,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난 짧은 경례와 함께 투벅투벅 걸어,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때였다.

“린아.”

 헬레나 님이 그리우면서도 무언가 애틋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셨고 난 멈칫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이어 헬레나 님과 눈이 마주치자 헬레나 님이 지금까지 와는 다른 푸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고마워.”

진심어린 그 말 한마디에 가슴이 찡해왔다. 이카루스 건과 더불어 헬라나 님과 헤어질 것을 의식하자 눈물이 핑 돌았다.

“워, 원로원을 위해서는 결코 아니에요, 착각하시면 곤란하다고요.”

귀까지 벌게져 고개를 돌린 나는 문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손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보답해야죠. 헬레나 님껜 빚이 있으니까요.”

오우, 이런. 내가 이렇게 몸이 배배 꼬일 정도로 기름기 있는 말을 하게 될 줄이야. 세상 오래살고 볼 일이였다. 난 뺨에 붉은 홍조를 띄우며 부랴부랴 밖으로 도망가다 시피 달아났다. 얼굴이 불 데인 듯 화끈거렸다. 난… 이래봬도 소심하다고.



[우리 린이. 예쁜 우리 린아.]

다정했던 그 목소리. 이젠 기억조차 희미해진, 세월 속에 빛바랜 ‘추억’이란 이름의 책장이 넘어간다. 밤이 여서 그런가. 좀 쌀쌀했다. …그냥 살짝. 나는 두 다리를 모아 양 팔로 감쌌다. 쏴아아아… 이따금 나뭇잎과 바람이 어울려 춤을 추었다. 숲이 즐거워 노래한다. 이리오렴, 어린 나의 보필자야. 숲이 내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동시에 나의 향수는 짙어진다. 겉을 치장하고, 둘러도 ‘나’라는 범위 안 이랬던가. 본질은 변한 것이 없다. 나는… 여전히 숲에서 삶의 터전을 얻고, 숲에서 태어나 숲에서 자라나는 숲 속 가문의 일원이었다. 여기서 남쪽으로 태양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 아니, 이 숲 전체가 내겐 기쁨이자 슬픔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짧게나마 이카루스의 어머니를 위한 묵념을 올렸다. 분위기를 숙연하였고 애수만이 나를 감싸 안았다.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니 또 다른 문제가 나를 괴롭혔다. 원정을 가면 100% 죽을 거라 호언장담 하던 나였지만 이젠 떠나는 것이 두려워 서가 아니라 헤어짐이 싫었을 뿐이다. 나는 고개를 다리를 감싼 두 팔 사이로 파묻었다. 순간 울컥했다. 괜히 울고 싶어지는 날이었다. 모든 것이 야속하기만 했다. 정든 고향, 정든 내음, 정든 친우… 이 많은 요소들이 어느 날카로운 것으로 내 심장을 도려내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 이런 혼란에서 날 건져주길 바랐지만, 이미 ‘혼자’라는 의식이 강하게 뿌리박은 나로썬 그저 먼 나라 이야기였다.

문득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따스한 그 품에 한번이라도 좋으니 다시 안겨 보고 싶었다. 철없는 애 마냥, 아무것도 모르는 애 마냥, 그 품에 안겨 모두 잊고 싶었다. 부모라는 울타리 안에서 나의 자유와 행복을 누리고 싶었다. 원정이니 이별이니, 내겐 버겁기만 하였다. 난… 감정 없는 목석이 아니란 말이야. 이따금 뿌연 안개가 서린 듯 흐릿하기만 한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리자 참고, 참고, 또 참았던 눈물이 뺨을 적셨다. 난 재빨리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치켜 올렸다. 슬쩍 콧물이 나오려 했지만 입술을 세우고는 필사적으로 막아 내었다. 웃고, 울고, 또다시 웃고, 울고. 감정의 기복이 유난히 많은 날이었다. 오늘은.

“아. 혹시나 했는데, 역시 린 님 이셨군요.”

어라, 여긴 나 말고 올 사람이 없는데? 나는 젖은 뺨을 손가락으로 털어내며 밑을 바라보았다. 감정에 휩싸여, 누가 온 지도 몰랐다니. 솔직히 약간은 충격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이렇게 고요히 하루를 마감하고 싶었는데 누구든 간에 방해받은 기분이 들어 그다지 달갑지 만은 않을 것 같았다.

“…선이구나.”

그나마 대자누님이 아니라는 것에 감사해야 할까나. 선이는 어쩌다 들어온 이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기척이 들리는 이곳으로 와보았다 전하며 자기도 어이없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잠시 자리에서 머뭇거리다가 밤바람에 펄럭이는 로브 자락을 붙잡고 말했다.

“거기 계세요. 제가 올라 갈 게요.”

 여기서 한마디 하자면, 내가 있는 곳은 나뭇가지 위였다. 꽤나 높고 곧은 나무 기둥은 자연적으로 자라난 만큼 무척 거칠었다. 그런데도 올라온다고? 나는 그가 낑낑대며 올라 올 것을 예상하며 실소를 머금었다. 나는 그의 행동을 천천히 주시하기 시작했고 역시 그는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킥킥. 에… 그는, 그러니까. 땅에서 불과 3cm 떨어진 지점에서 송진을 손에 묻히고 인상을 잔뜩 찡그리다가, 입안 가득 야식을 챙기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던 다람쥐 씨와 눈 맞아 얼굴을 할퀴고, 으아악! 따가움에 무의식중으로 얼굴에 손을 댔다가 균형을 잃어 허둥대고 그대로 나무에서 떨어져 맨 바닥을 열심히 뒤구르기 하고 맞은 편 나무에 뒤통수를 박고 퍼억, 아그그, 대며 나뭇잎을 털어내고는 씩씩대며 내가 올라 탄 나무를 째려보다가 막가겠단 식으로 나무를 향해 돌진하고―중간에 점프라도 하여 나무에 올라탈 심상이었나 보다―돌멩이에 걸려 이번엔 앞구르기를 하여 나무에 코를 박고 그 여파로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를 머리에 정통으로 맞았다. 콩. 그는 아예 대(大)자로 뻗어버렸고, 나는 혀를 쯧쯧 차며 밑으로 내려가 그를 살피었다. 푸헤헤, 감히 날 웃기다니!!

“푸읍, 서, 선아 괜찮아?”

선이는 어지러운지 입을 딱 벌리고 입을 열었다.

“아… 네… 아마도요.”

선이는 미간을 좁히며 머리를 짚었고, 내가 내민 손을 잡고는 가까스레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이래서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도 말라는 건가? 오늘 얼떨결에 아주 좋은 교훈하나 얻었군, 풉. 나는 피식 웃으며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헬레나 님께 전해 들었습니다. 다시 원정에 나서신다고…….”

선이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찌르는 아픔에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난 반박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고 뭐가 어떠냐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하였다. 내 무덤덤한 대답에 그가 별말 없자, 이때다 싶어 그 전 원로원 회의장에서의 일을 사과하고자 입을 열었다.

“있잖아, 서…….”

“그러도 보니 곧 있음 ‘트윈 문(twin moon) 축제’군요.”

마치 그때의 일을 묻어가려는 듯 내 말문을 막고 달을 보며 말하자 나는 힘 빠지는 미소를 지으며 선이의 시선을 따라 하늘에 떠있는 겹쳐진 두 달을 바라보았다. 불꽃같이 정열적인 붉은 달, 타네시아와 시리도록 파란 달 셀레스틴이 사이좋게 손을 맞잡고 있었다. 하지만 아쉽군.

“우린 그 때쯤 몬스터와 한 판 뜨고 있겠지. 쩝. 새삼 가기 싫어지는데?”

‘트윈 문 축제’는 꽤나 큰 축제 중의 하나였다. 뭐, 축제야 거기서 거기겠지만 겹쳐진 두 달이 무척이나 아름다워 어렸을 적 이 날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하였다. 내가 빈정대며 말하자 선이가 자신의 칙칙한 검은 로브를 바라보더니 울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참 다행인 것 같네요.”

후후… 나는 저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가 ‘트윈 문 축제’를 싫어하는 이유!! 전에도 밝혔듯 그는 저 검은 로브를 벗은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 날’ 이후로는. 그전에 딱 한번 ‘트윈 문 축제’ 때 어색하다는 듯 수줍게 웃으며 평상복을 입고 온 그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하던 때를 슬쩍 회상하던 나는 겸연쩍게 웃었다. 그땐 정말 여자들이 그와 춤 한번 춰보자고 안달이나 줄의 줄을 늘어선 일 때문에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지다 못해 질린 그가 그 뒤, 평상복 한번 입은 것을 ** 못했다. 뭐, 지금에 와서 그가 저 검은 로브만큼 잘 어울리는 옷은 없는 것 같지만 말이다. 항상 입가에서 떠날 줄 모르는 하하 웃음이라는 트레이드마크를 덤으로 지닌 그만의 마스코트랄까? 여하튼 그 일로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여자애들로 인해 약 두 달간 ‘오, 신이시여.’를 외치며 산 속에서 도를 닦았다는 루머가……. 어허흠.

그 또한 나와 같은 일을 회상하는 지 눈꺼풀을 내려트리며 측은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동조의 의미로 그의 어깨를 토닥거려주었다. 선아… 원래 인생이란 다 그런 거란다. 호호홋~. …어쩌면, 난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걸지도…….

선이의 손짓에 따라 어깨를 토닥여주던 손을 거둔 나는 히죽히죽 웃었고 그도 따라 어이없는 웃음소릴 흘렸다. 나는 달빛에 얼추 비춘 그의 얼굴선이 매우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의 옆모습을 세세히 관찰하던 나는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들썩였다.

“아니, 난 그게 아니라, 저기, 그러니까…. 윽, 체엣. 얼굴 좀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잖아! 아, 알았으니까 그런 눈빛은 좀 치워달라고. 이씨, 뭔 남자가 그렇게 곱살하게 생겼냐?”

그만 선이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어순도 무시, 문법도 무시한 채 되 먹잖은 변명을 늘어  놓던 나는 후반에 가선 짜증스런 얼굴로 막 말했다. 그러자 한쪽 입고리를 살짝 들어올린 선이가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웃음 속에 한숨을 흘려보냈다. 벌려진 다리를 두 팔로 끌어안은 그는 다시금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 모습에 입술을 삐죽였다.

“저기, 선아…. 한 가지 물어봐도 돼?”

“네.”

난 모든 물어보라는 투의 대답소릴 들으며 고개를 천천히 떨구었다.

“어째서 오시리아 대륙 원정에 선뜻 동의한거야?”

최대한 비위에 거슬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묻자 뜬금없는 내 물음을 받은 선이는 전혀 놀랜 기색 없이 오히려 내 의문을 부추기는 애매모호한 답변만 건네올 뿐이었다.

“…글쎄요. 왜 일까요. 무모함을 알면서도 뛰어든 다는 건…….”

쏴아아… 또다시 살랑거리며 다가온 바람이 나와 선이의 머리카락을 짓궂게 헝클어트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낮은 적막 속에 선이의 모습은 마치 주위의 모든 사물들과 격리 된 듯한 착각을 일게 만들었다. 그의 모습은 무척 고아해 보이면서도 구슬퍼 보였다.

과연 지금 선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헤어짐? 혹은, 만남. 한적함? 혹은, 산만함. 평화? 혹은, 전쟁. 단 하나 확실할 수 있는 건 이런 분위기과 별로 친하지 않다는 것.

“에잇! 귀찮게시리.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자고. 가면 가는 거고, 안 가면 안가는 거지 뭐가 그리 심각해? 쉽게, 쉽게 가잔 말이다. 마음 가는 길이 곧 옳은 길이라잖아. 그렇게 골똘히 생각한다 해서 자다가 몬스터가 ‘나 자결할래!’라고 외치면서 혼자 죽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아! 그래! 선아, 너 혹시 시간 있니?”

선이는 설마 내가 이렇게 박력(?)있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아직도 얼떨떨해 하면서 등 뒤로 땅에 손을 짚고는 멍하니 날 올려다보았다. 자리에서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 두 주먹까지 불끈 쥐며 큰 소리 팡팡 치던 나는 그 시선에 에헤헤, 거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선이는 한심하다는 듯이 날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 젓더니 자세를 바로 하고는 차분히 말하였다.

“예. 아주 남아돌아요.”

선이는 맑게 웃었다.

“나 말이야. 산책 삼아 마을들을 둘러보고 있는 중이거든? 괜찮다면 같이 갈래?”

난 최대한 어린아이처럼 티 없이 밝고도 맑은 미소를 띠도록 노력했다. 에이미도 없겠다 혼자가기도 뭣했는데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자, 난 티끌의 흑심도 없단다. 단연코 널 골리거나 길을 거닐다 모르는 척 발을 걸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자, 어서!

“아… 저.”

선이는 오히려 이런 내 표정이 두렵다는 듯 식은땀까지 삐질삐질 흘렸다. 선이는 얼굴에 ‘전 지금 엄청난 중대사를 결정 중입니다.’라는 문구를 이마에 써내려가며 무척 고심하더니 결의에 찬 목소리로 힘차게 말했다.

“네. 좋아요.”

이것으로 변함없이 마을을 둘러보겠단 내 여정에 선이 또한 함께 동행 하게 되었다. 별달리 할 일도 없고, 자신도 그럴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출발 일에 따로 만날 필요 없이 같이 가기로 한 것이다. 겸사겸사 다음날 푹 쉴 겸, 준비할 겸 모레로 약속 날짜와 약속 장소를 정하였다. 이는 내가 집에 틀어 박혀 있을 적 온 비로 인해 원로원 측에서 오시리아 원정 준비가 하루 늦춰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차, 내 거절과 요청으로 커닝시티는 가지 않게 되었다. 선이도 내 기분과 표정을 어느 정도 읽은 것인지 두 말하진 않았다.

밤은 깊어져만 갔고, 등 떠밀다시피 선이를 먼저 보낸 나는 다시금 나무 위로 올라갔다. 몇 아름은 족히 되는 이 나무의 가지는 그 기둥만큼이나 튼실하고 너비가 넓어 생각하는 것 보다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까만 밤하늘에 매달린 수많은 별들을 보며 그렇게 잠이 들었다. 모포… 챙겨올걸 그랬나? 후회는 언제나 불시에 일어난다. 새벽을 견디기엔 좀 무리 있어 보이는데. 난 적반하장으로 날 탓하기는커녕 날씨에게 불만을 토로하며 완전한 잠에 입을 맞추었다. 오늘 꿈자리는 유독 좋을 것만 같았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나는 내 생각을 정정했다. ***. 평온하긴 개뿔이 평온하다. 또옥―퐁당. 나뭇잎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고인 물웅덩이에 빠져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멋모르는 사람들이야 밤새 이슬이 맺혔구나,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게 너무 예뻐, 라며 별 해괴망측한 소설을 짓겠다만 은 나는 험악하게 인상을 구길 뿐이었다. 진실은 둘이 될 수 없다. 나는 축 쳐져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하늘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빌어먹을. 어젯밤 비가 왔다.

하하… 그래, 내가 이렇지, 뭐. 세상은 감히 날 가만 두지 않는 다니까?

쨍쨍 내리 쬐이는 햇빛은 언제 비가 왔다는 듯 마냥 창창하게 만물을 비추었다. 저 태양마저 날 조롱하는 것 같았다. 그 무엇보다 온 몸이 질척 거려 기분이 나빴다. 옷은 비 특유의 냄새를 풍기며 비에 찌든 내 몸에 거머리처럼 착착, 붙어댔다. 지지리도 운 없기는. 물론 헤이스트 마법으로 단숨에 집까지 달려가는 거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이런 상태로 빠른 속도로 달린다면 십중팔구 감기에 걸려 생고생 할게 불 보 듯 뻔했다. 기분 한번 죽이는 군. **.


꼬르륵거리는 배를 움켜잡고 가까스로 집에 도착한 나는 뜨뜻한 물에 푹 퍼지고, 먹고, 자고, 장 보고, 뒹굴고, 티타임! 입 놀리고, 먹고, 뒹굴고, 졸고, 건량, 육포 따윌 챙기고, 먹고, 또다시 뒹구르르, 에헴, 하루도 짧군. 금방 밤을 맞이하였다. 짧다, 짧다 하더라도 지루하긴 하였다. 난 식량을 미리 챙겨놓은 조그마한 배낭 안에 여벌의 옷들을 비롯하여 모포나 필기도구, 세면도구 등을 쑤셔 넣었다. 긴장도 되고, 찹찹하기도 하고. 여러 감정들이 얽기 설기 복잡하게 얽혀 매우 난잡하였다. 이 정도면 짐도 다 쌌겠다. 나는 기지개를 펴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이제 이 포근한 침대에서 폭신한 베개에 기분 좋게 얼굴을 파묻으며 오늘과 같이 환희에 달아올라 꿈나라로 갈 수 없다는 것과 이제 곧 오랜 친우와의 작별을 고해야 한다는 생각에 새삼 내일이 조금이라도 늦게 찾아오길 빌었다.



오! 다음날 우리의 위대하시고, 거룩하시며, 단아하고, 우아하고… 여하튼 만물을 겸** 우리를 굽어 살피시는,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좋고 좋은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도 모자를 그런 고귀하신 신께서 나의 자그마한 소망을 들어주셨다.

“우아아악!!”

난 괴팍스런 괴음을 질렀고, 그 소리에 나뭇가지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새가 퍼뜩 날아오르는 날개 짓 소리가 들려왔지만 일단은 무시되었다. 프라이팬에 대충 버터를 두르고 식빵을 올린 후 발에 헤이스트 마법을 건 나는 빠른 속도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를 반복하며 준비에 바빴다. 화장실 바닥에 미끄러지거나 행방불명 된 양말 한 짝을 찾아 헤매거나 실수로 식빵 한 면을 새까맣게 태운다던가 하는 부수적인 것들은 내 앞길을 막기엔 아무래도 부족했다.

진실로 내가 맡이 한 어젯밤의 ‘내일’이자 ‘오늘’은 다른 사람에 비해 늦은 시각인, 그렇다. 늦잠이다.

친절도 하셔라. 아무렴, 누가 존·경·하는 분이신데.

나는 미소 뒤에 새겨진 정교한 십자 마크를 매만지며 그렇게 뛰어다녔다. 이윽고 준비를 마친 나는 미리 챙겨 둔 가방을 매고 새까맣게 탄 식빵을 입에 물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열 발자국 남짓 떨어진 거리에서 다시 멈춰 섰고 멋쩍게 돌아와 집 문을 걸어 잠갔다. 내가 생가해도 내가 한심하군, 쳇.

돌진이다. 이제부터 돌진이다. 지금처럼 이렇게 달려야지. 앞만 보고 달려야지. 나는 내 뒤로 스쳐지나가는 청량한 바람을 거스르며 헤네시스 공원으로 향했다. 아침 일찍 만나기로 했는데, 선이가 지금까지 기다려 주고 있을지 모르겠다. 이렇게 한발자국. 오시리아 대륙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미안해, 선아. 내가 좀 늦었지? 많이 기다렸어?”

나는 눈썹을 말아 올리며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요, 저도 방금 왔어요. 괜찮습니다.”

선이는 미안스런 내 표정에 별것 아니라는 듯 두 손을 휘저었고 웃으며 괜찮다 시인했다. 난 그 모습에 다시 한번 그의 아량에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갈까?”

…분명 이렇게 되었어야 할 스토리 건데… 어째서…….

“…괜찮습니다. 정확히 3시간 27분 43초가 지났군요. 비록 하루의 1/8에 해당하는 시간이 헛되이 흘러갔지만, 뭐… 좋아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 30분이 넘었다면 전 그래도 린 님의 거처에 파이어 볼을 날렸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무척 곤란하시겠죠? 큰 소동도 일어났을 테고요. 일단 그런 번거로운 일을 겪지 않게 해주신 점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또한 제 인내력을 한층 더 끌어올려주신 점에서 다시 한번 감사드리죠. 그런데 오늘따라 유독 덥군요. 이상기후일까요? 하하.”

화, 났, 다. 이거 온 몸이 쩌릿쩌릿 한데?

선이는 참으로 경의를 표하며 미소 지었다. 물론 타인의 눈으로 모았을 때고, 직접 대면하는 나로선 소름끼치도록 놀라운 그의 교묘한 두 얼굴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저, 속에서부터 끌어 오르는 음산함이란! 선이와 함께 해온지도 어느덧 10여년이 흘렀지만 선이가 화를 낸 적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게 중 정식으로 화낸 적은 한두 번 정도? 음음, 그땐 정말 그날로 인생 종치는 구나했었는데. 이, 이게 아니라. 난 머리를 푹 숙여 발끝으로 돌멩이를 툭 치며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이건 신의 농간이야.”

그 뒤 꽤나 긴 시간 동안 선이의 불평 아닌 설교를 들은 것 같다. 대부분의 얘기가 첫마디와 일치한다는 것이 약간의 흠이었지만, 나에겐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선이는 묵은 체중이 쑥 내려간, 흡사, 변비로 고생하던 사람이 무려 두 달 만에 쾌변을 본 사례처럼 상큼한 표정으로 말했다. 얼굴에서 윤기가 흐르고, 몸에서 샤방샤방 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착각이 자꾸만 드는 건… 역시 나만의 착각일가나.

“으흠, 혹, 헬레나 님이 말씀하셨나요?”

선이는 자신의 턱 선을 매만지며 진지하게 말했다.

“뭘?”

난 그 한마디 단어 속에 그 전, 헬레나 님 뵈었을 때의 감상을 듬뿍 담아 되물었다. 즉, 생각하고 싶지도 않는 그런 연속적인 불행이 있을 수 있냐는 둥의 감상 말이다.

“또 다른 동행자분이 한 분 계십니다.”

이거 뭔, 시궁창 두드리는 소리? 대리 따윈 없다 들었는데? 그 말인즉슨, 헬레나 님이 나에게 이중으로 사기 쳤다는 거? 나는 발끝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불신감에 눈을 부릅뜨며 선이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쏘아 보냈다. 움찔한 그는 어깨를 움츠렸고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그게, 제가 동행을 부탁했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그렇군. 나는 급하게 표정을 뒤바꾸며 대답했다.

“아아, 괜찮아.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그런데 이거 의왼데? 설마 네가 몽상가를 알고 있을 줄이야.”

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뒤에 딸려 나오려 하는 ‘그럼 방패막이가 하나 더 느는 셈인가? 후후.’라는 사악한 문장을 목구멍 속에 억지로 밀어 넣으며 말을 끝 맞췄다. 그런데 누구지? 나는 옆에 핀 들꽃을 꺾어 향기를 맡으며 경각, 그 의문에 대해 혼자서 추론해보았다. 몇몇 짚이는 구석이 있는 인물들―주로 정신상태가 희한한―이 뇌리를 스쳤지만 이거다 싶을 만한 인물은 없는 듯싶었다. 이리, 저리 생각해 보아도 전혀 종잡을 수 없자 나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선이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아뇨, 린 님도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만.”

난 그 말에 더욱 번뜩여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는 인물들을 쫓았다.

“그게 누군데?”

내가 뚱하게 묻자 선이는 뭔가 찔리는지 말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그분 말이에요. 그분!”

“…그분?”

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하며 되물었고 동시에 선이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이 누군데?”

선이는 크게 당황하였다. 역시나! 예측이 사실로 탈바꿈하는 순간 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아까의 복수다! 난 짓궂게 웃으며 넌지시 물었고, 마침내 그는 악 질렀다.

“아악! 그분 말이에요, 그분!!”

간추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가 지금껏 회피하고 있는 질문의 답은 바로……!

“설마 이름이 기억 안 나는 거냐?”

“아, 아니에요!! 다만 그분의 이름이 너무 고귀하셔서 부를 수가 없어요, 하하.”

선이는 내 말에 극구 반문하였다. 역시 봐도, 봐도, 골려도, 골려도, 전혀 질리지가 않는다니까. 선이는 내가 계속해서 추궁하는 눈빛을 보내가 한계라는 듯 일순간 얼굴을 굳히며 이렇게 말했다.

“이건 그분의 전략입니다! 바로 신비주의 전략이죠. 에… 또 결정적인 순간에 봐야 놀람도 두 배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잠시만 그 호기심을 눌러 담으세요, 하하하.”

나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기로 하였다. 저 처절한 몸부림도 볼거리는 볼거리겠지만 이 넓은 아량으로 봐주도록 하지. 하지만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해 두라고. 난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여러 가지 그를 골려줄 방안을 모색하였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때였다.

“여어! 이게 누구신가! 선 세바스찬과 린 에리노 아니야? 반가워, 친구들!”

선이는 놀란 기색을 영력이 드러내며 내 뒤에 서있을 한 인영을 가리키며 외쳤다.

“아앗! 그, 그분!!”

그 소리에 놀란 나는 헙, 하고 짧은 신음소리를 내며 냉큼 뒤를 돌아보았다.

아뿔싸. 그곳엔 다름 아닌 그가 서있었다!!



=============================Special================================



제 2화 출발


당신은 만약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대가 극적인 순간 나타나 손을 내민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는 단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대일 뿐, 당신에게 정신적 스트레스 외에 폐를 끼친 적은 없다. 그렇다고 하여 특별히 그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며 그와 어느 정도의 친분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손을 뿌리친다, 잡는다. 방법은 이 두 가지이지만 손을 잡는 쪽이 객관적으로 이득일 것이다. 대게의 사람들은 무덤덤하게 손을 잡으며 일어나 이렇게 말하겠지. ‘다음엔 내가 돕도록 하지.’ 혹은 ‘이 빚은 언젠가 꼭 갚겠다.’라고. 하지만 모두가 옳다, 라 말할 때 나만은 그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희한하고도 유니크 한 정신세계를 지니고 있는 나는 당당히 그 손을 뿌리치겠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겠지. ‘혼자 일어날 수 있어.’혹은 ‘네 도움 따윈 필요 없어.’라며. 나는 진정 그것을 원했고, 시도의 가능성 또한 노려보았으나…, 현실은 냉혹했다. 지금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사람은…….

“…하하하, 그래서 그 망할 만지 자식이 뭐랬는지 알아?”

여느 실력 있는 조각사가 피땀 어려 완성한 석고상의 세밀함과 정교함처럼 왠지 위화감이 느껴질 만큼 아름다운 얼굴을 한 그. 시원스런 콧날과 얇고 도톰한 입술에 하늘 닮은 푸른색 눈동자. 게 중 난 깊이 있는 그의 푸른 눈동자를 좋아했다. 건강미를 보여주는 적당히 그을린 살갗에 검을 쥐니만큼 체력적, 체구적, 균형 잡힌 탄탄한 몸. 누구든 지나치다가도 다시금 뒤돌아서게 만드는, 외면상 그는 무척 이상적인 존재였다.

“…글쎄 ‘네가 비록 나보다 검술은 뛰어날지라도 내 굳건한 신념의 푯대만은 네 머리위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라는 거야!”

그는 매우 아름다웠고, 누구든 그에게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나와 같이 느긋한 일상을 좋아했고, 손수 제작한 그물침대를 그의 제 1의 보물로 여겼다. 말끔하고 신사 같은 그에겐 24시간 언제고 함께 붙어 다니는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의 허리춤에 자리한 그의 애검인 난화지검(暖和漬劍)이었다. 그는 한시도 그 검을 몸에서 뗀 적이 없었으며, 그 검의 화려한 자태에 사람들은 한 번 더 감탄하기도 하였다.

그는 어느 순간 뒤돌아보았을 때 우리와 함께였다. 그는 그가 실질적으로 어디에서 왔고, 누구의 아들인가 하는 기본적 바탕이 되는 지식을 우리에게 심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누구도 그의 행선지를 아는 이는 없었고, 안 다해도―극소수일 것이다― 극구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우리와 함께였고, 지리적으로 동쪽에 위치한 엘리니아에 거처를 잡았다. 그 언젠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는 얼마 안 되어 곧 빅토리아 대륙 최고의 검사로 자리 매김하면서 모든 소년, 혹은 검을 쥔 자들의 선망과 신임을 동시에 받았다. 모두들 그를 좋아했고, 그를 신용했으며, 그를 따랐다.

“…어쨌냐고? 당연 두들겨 패줬지. 아마 그 자식 눈에 박아둔 멍이 다 낫기 전까진 삿갓도 못 벗을 거야. 킥킥. 게다가 방금 전에 슬쩍 들러봤더니 자기한테 말을 걸어오는 족족  애궂은 삿갓만 푹 눌러쓰고는 ‘**라.’, ‘다친다.’만 반복하고 있는 거 있지? 쿡쿡.”

…이건 어디까지나 타인들의 평일뿐이고. 나는 그와 반대되는 입장이다! 그는 사악하였다. 이유를 묻는다면 대답은 그냥. 이유 없이 피하게 되는 걸 낸들 알겠나. 어쨌든. 선아, 너 말이야. 도대체가 제정신이기나 한 게냐? 아… 마법사는 미치기 쉬운 직업이었지.

“…그나저나, 린 에리노. 너 듣고 있기나 한 거냐?”

벌꿀을 찍어놓은 듯한 그의 짧은 금발머리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나는 여전히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하하, 도무지 웃겨서 말이 나와야 말이지. 그러니까, 지금 저 세상 물정 모르는 대자누님을 데려가자고? 선아, 진심이냐? 물론 도움이야 많이 되겠지. 하지만 자칭 엘프라 떠벌리는 대자누님을 데려가면 미치광이 소리 듣는 건 예사 일일 터이고 저렇듯 정신적 스트레스를 친히 하사하시겠지. 그 뿐 만이냐. 대자누님의 그 영광스런 먹성으로 식량까지 축내겠지? 그럼 어떻게 되겠느냐. 오시리아 대륙을 개척하기는커녕 굶어 죽지만 않아도 감지덕지할 따름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동행한다고?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소리!

나는 짧은 시간 동안 이런 생각을 함과 더불어 지금 이 자리에 10t 짜리 망치를 끌고 와 대자누님을 이 땅에 영원히 뿌리 밖에 하는 건 어떨까, 하는 실로 위험한 발상까지 심심치 않게 하였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위대하신 대자형님을 뵈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거겠죠. 걱정 마세요.”

뿌득.

난 선이의 말에 이를 갈았다. 그러나 이왕 이렇게 된 거, 선이를 다시 설득하는 수밖에 없게 된 나는 얼굴에 경련이 이는 것도 꾹 참고 웃었다. 나는 선이의 어깨를 낚아채며 귓전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 설마하니 진심은 아니겠지? 네 잘 돌아가는 머리로 생각 좀 해보란 말이다. 대자누님이 같이 가면…….”

내말은 이 이상 완전한 문장이 되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난 그 다음 이어진 상황에 헛바람을 들이켰다. 다름 아닌 대자누님이 씨익 웃으며 그 잘난 얼굴을 가깝게 들이대고 있었던 것이다. 저건 분명 내가 어떤 말로 선이의 어느 쪽으로 심경을 기울일 것인지 이미 예상 했다던가, 그럼 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말해두지, 린 에리노! 나보단 네가 더 시끄럽다. 냐하하핫!!”

“그래요, 린 님. 대자형님이 같이 가시면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될 거라고요.”

“들었지? 들었지? 그냥 항복해라, 쿡쿡.”

아아, 망했다. 아무래도 후자가 맞는 모양이군. 만약 나에게 전적인 임무가 내려졌음 또 모를까. 선이와 나. 이 둘에게 똑같이 내려졌기 때문에 우리가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같았다. 그러니 어떻게 하겠는가. 저 둘이 저렇게 벼르는데 나라고 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뒤 대자누님의 얄망궂은 웃음소리가 헤네시스 공원에 울러 퍼졌다. 냐핫, 냐핫, 냐하하핫!! 나는 그의 안면에 펀치를 날려주고 싶은 그런 위험 무쌍한 충동을 겨우겨우 눌러 담으며 랑디르베르 님께 빌고 또 빌었다.

‘제발, 굶어 죽거나,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해 죽지 않기를…….’

한바탕 웃어젖힌 그는 대뜸 선이에게 물었다.

“그런데 세바스찬 군. 할아범 뵌다 하지 않았었나?”

매끈한 턱을 매만지며 대자누님이 묻자, 선이가 허연 볼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문전 박대 당했죠, 뭐.”

그러자 대자누님이 허리를 굽혀 킬킬대기 시작했다.

“할아범답군. 그래서 뭐라 디?”

마치 옆집 친구대하 듯 선이의 스승님을 ‘할아범’으로 일축해 말하는 대자누님. 비록 선이의 스승님, 즉, 듀스피앙 엔셜 씨가 우아한 이름과는 달리 괴짜란 소문이 자자하기는 하나 올해로 일흔 줄에 들어선 노인이었다. 여기서 잠시 그의 일대기를 논하자면, 약 30년 전에는 최고의 권력기구인 원로원 위원이었고, 5년도 안되어 은퇴하고는 마을에서 동떨어진 외진 숲에 낡은 오두막집을 지어 마법 연구에 매진했다, 전해 들었다. 그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난 엉덩이 무거운 자네들과는 달라. 한 자리에 엉덩일 지지고 앉아 있을 타입이 아니란 말일세. 또… 이제 엄마가 밥까지 떠먹여줄 나이도 이미 지났거든.’ 마지막 말은 단순히 다른 위원들을 풍자한 말이었다. 실질적으로 자료를 준비하고, 정리하고, 결제까지 힘든 업무를 꾸준히 행하는 건 순전히 그 밑에서 일하는 비서관들인데, 원로원 위원들은 가만히 앉아 그 철통같은 입만 대충 놀리는 게 고작이란 뜻이다. 물론 위원들이 그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당시 개방적이고 활동적이었다던 듀스피앙 엔셜 씨로선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진저리 칠만큼 답답하고, 지겨웠으리라 짐작된다. 뭐, 마법 연구를 위해서라면 마지막 옷 한 벌까지도 주저 없이 팔아넘길 그이니, 단지 그 이유만이라 단정 짓기엔 억지겠지만. 그래서 더더욱 괴짜라 불리는 그였지만, 그렇게 무례한 말을 하고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은퇴한 뒤 몇 달간은 원로원 측에서 끈임 없는 그의 재귀를 간청했다는 걸 보니, 그래도 듀스피앙 엔셜 씨가 얼마나 비상했을지 대충 짐작이 가지만 말이다. 현재에 와, 어떤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거리를 배회하던 선이를 제자로 받아드리고 마법 연구에 미쳐 오두막집을 세 번이나 폭삭, 가라앉게 한 전적이 있는, 인생이 파란 만장한 듀스피앙 엔셜 씨였다. 그래도 예(禮)만은 강조하여 밖에서 참으로 위엄 있고 체통 있는 사람이었다. 좋은 말로 하면 격식 있는 자, 막말로 하면 이중인격자였다.

“아, 그게… ‘다시 만날 텐데 번거롭게 뭣 하러 왔느냐!’라시더군요.”

선이는 듀스피앙 엔셜 씨의 굵직한 목소리를 흉내 내는 듯 굵은 목소리를 자아해 내었다. 중간에 얼핏 쉰 소리가 나왔지만 선이는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뒷머리를 짚으며 하하, 거렸다. 저런 선이의 행동을 보며 ‘저거 진짜 천재 맞아?’란 의문이 드는 시점에서 선이는 갑자기 180° 돌변한 태도로 진지하게 말해왔다.

“아무래도 제가 떠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계셨던 모양이에요. 뭐, 그만큼 학식이나 견문이 높으신 분이시니, 조금만 머리를 굴리셔도 현 빅토리아의 정세나 기강을 꿰뚫는 건 물론이거니와 그에 대한 돌파구, 즉, 어찌하여 오시리아 대륙을 개척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신다는 건 당연 의심의 여지가 없겠지요.”

선이는 듀스피앙 엔셜 씨가 마치 자기 자신이라도 되는 듯 마냥 콧대를 높이며 나와 대자누님을 쳐다보았다. 나와 대자누님은 의미 모를 눈빛을 주고 받아가 어느 순간 짜기라도 한 듯 다시 선이를 바라보았다. 나는 씩 웃었고, 납득이 간단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이때만큼은 최강의 콤비를 자랑할, 대자누님과 나였다.

“그런데 네가 가는 건 어떻게 아신 거야? 설마 누구도 모르게, 심지어 밤 고양이들도 모르는 세 돗자리가도 깐 모양이지?”

내말에 선이는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핵심을 찔렀군. 난 속으로 쾌거를 불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높아 보이던 콧대가 무척 낮아 보였다.

“그… 그건. 그, 그래요!!”

“엿들었으니까 알지.”

선이가 말을 이어 명쾌한 답을 내놓으려 하자 대자누님이 선이의 말을 가로채며 얄밉게 웃었다. 선이는 도저히 납득이 가질 않는 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마에 세로 주름을 만들고는 대자누님에게 물었다. 대자누님은 선이의 표정에 실실 웃어댔다.

“저기, 엿들었다니요?”

대자누님은 실소를 질질 흘리며 대답해 주었다.

“그 할아범 원로원 회의장 밖에 있었거든.”

“네?”

선이는 입에 파리라도 들어갈 세라 입을 쩌억 벌린 채 대자누님을 향해 고개를 기웃했다. 대자누님은 왼쪽 눈을 찡긋하더니 손가락을 들어 한쪽 벽면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야. 귀를 쫑긋 세우고는 옆머리를 벽에 박고 있더군.”

“푸읍, 픕, 푸하하하!!”

나는 그만 폭소 해버렸다. 그 위엄 있으시고 체통 있으신 듀스피앙 엔셜 씨가… 푸히히히!! 난 별 인간답지도 않은 웃음소릴 내며 행여 놓칠세라 재빨리 선이의 심경을 살피었다. 역시나! 선이는 금방이라도 ‘이건 아니잖아!’라고 외칠 법한 표정을 지었다. 선이 딴에서도 처량하게 바닥에 쪼그려 앉아 마법을 쓰는 것도 아니고, 벽에 머리를 쳐 박고 회의를 엿들었을 자신의 스승님의 모습이 상상이 되질 않는 모양이다. 그러다 이내 생각을 굳혔는지 선이는 겸연쩍게 웃었다. 그러나 아직도 속내는 듀스피앙 엔셜 씨의 그런 모습을 쫓고 있는 듯 했다.

“다른 이들의 견해도 살펴보시겠단 우려 깊은 생각이셨겠죠. 하하, 세상에 완벽한 인간의 존재가 가당키나 할까요?”

부인이다! 선아 고통스럽겠지만 현실을 받아들이렴. 후에 들어보니, 내가 돌아간 직후 곧 바로 헤어진 헬레나 님과 선이를 보며 부리나케 잠적한 듀스피앙 엔셜 씨를 흥미롭게 바라보던 대자누님이 원로원 회의장에서 나오는 선이를 만나게 되었고, 그때 선이가 대자누님에게 동행을 요구했다, 하였다.

“있어.”

또 다시 대자누님의 뜬금없는 대답이 날아오자 속으로 선이를 위한 짧은 묵념을 올리고 있던 나는 그 대답이 무엇에 대한 대답인지 상기하기 위해 잠시 벙쩌진 얼굴로 대자누님을 대면해야만 했다. 만약 실제로 그 ‘완벽한’인간이 존재한다면 선이의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힐 것임은 당연하거니와 선이의 스승님 또한… 꽤나 난감해 해야 할 터이다. 대자누님은 최고의 표시로 엄지손가락을 우아하게 들더니 손목을 틀어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나.”

대자누님은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고 나와 선이는 조용히 그 포즈를 감상하다가 상큼하게 한번 웃어주었다. 나는 살포시 뒷주머니에서 뇌전 수리검을 하나 꺼냈고, 선이는 고목나무 스태프를 움켜쥐었으며, 동시에 캐스팅에 들어갔다.

방긋방긋.

다신 한번 말해두지만, 우리 둘은 분명 웃고 있었다. 그런데 당최 무엇이 잘못 된 것일까. 대자누님은 짧은 신음소리를 자아해 내며 냅다 줄행랑치기 시작했다.

“럭키세븐!”

“에너지 볼트!”

그것이 우리에게 시작을 알리는 출발 신호의 역할을 하였고, 우리 둘의 시동어는 동시에 나왔다. 내 뇌전을 날아가던 도 중 두 개가 되어 대자누님을 향해 날아갔고, 선이의 에너지 볼트는 그의 마력에 비례하여 다른 사람에 비해 더 크고 강하게 돌진 하였다. 이윽고 대자누님이 우리 둘의 시아에서 벗어났을 때 즈음, 헤네시스 공원에는 방금 전과는 다른 의미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피유우웅, 쿠콰아앙!!

“으갸아아악!!”

다같이 묵념.



이어, 헤네시스 공원에 인위적으로 생성되었던 빛 무리들이 사그라지고 우리가 다시 대자누님을 만난 건 그로부터 약 10분 후였다. 여느 때처럼 기척도 없이 다가 온 자칭 엘프 씨, 대자누님은 엄청난 속도를 내어 달려왔는지 그 증거로 그의 금빛 머리카락이 잠시 동안 허공을 휘날리다 차분히 가라앉았다. 항상 너도 나도 모르게 기척 없이 사라졌다 기척 없이 등장하니 이젠 새삼스럽게 놀랠 일도 없었다.(물론 선과 나, 이 둘에게만 해당하는 얘기지만.) 금발 머리 끝자락에 잿빛 연기를 달고 온 그는 바보처럼 헤실 거렸다. 이윽고 잿빛 연기가 바람 따라 모험을 떠나고 간 자리엔 그을린 머리카락과 함께 몇 가닥 빠졌지만 그는 아랑곳 하지 않고 웃었다. 그래도 약간의 죄책감도 느꼈었는데… 저 얼굴을 보니 싹 사라지는 군. 선이나 나나 일부러 목표물을 빗나가게 겨냥했다만 살짝 실수로 위장한 채 한방 먹일 수도 있었단 말이다. ‘아앗, 손이 미끄러졌어, 미안해, 대자누님. 내 양심을 속일 수 없었어. 좀 많·이·아플 거야. 하지만 일주일간 미음이나 죽 따윌 질리도록 먹고 집안에 꼼짝 틀어 박혀 침대에 누워 천장 무늬 모양을 다 셌을 때쯤 괜찮아 질 테니까 안심해. 뭐, 그래도 낫지 않는 다면, 팔뚝만한 주사를 엉덩이에 꽂고 끔찍한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 한방에 나을 거라고.’라는 식으로. 하지만 저 금발머리나 옷 가장자리가 그을린 건 저 바보 같은 대자누님이 뇌전이나 에너지 볼트를 피하려다 저런 거겠지, 쯧쯧. 그래서 더 아쉬움만 남잖아? 다음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 나는 눈을 반짝였다.

나는 결국 항복했다. 꼭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나불대는 게 안쓰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이 말이 조금이라도 새 나갔었더라면 대자누님 옆에서 대자누님 흉내를 내고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나는 곧 대자누님에게 내 의사를 밝혀 선이에게처럼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남은 하루간만이라도 함께 빅토리아 4대 마을을 둘러보자 요구했다. 난 당연히~ 동의할 줄 알고 고개를 끄덕일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대자누님은 고개를 저으며 마지막 착·한·일을 한다며 먼저 홀라당 가버렸다. 덩그러니 남게 된 나와 선이 사이엔 이상한 기류가 맴돌았고… 무안해진 나는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대자누님… 두고 봐!!



눈 깜짝할 세 낮이 되어 있었다. 마을 펍에 들러 끼니를 떼 운―선이가 내 몫까지 원로원에서 메소를 지급받아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선이와 나는 좀 더 놀다가라는 밍밍 부인의 권유를 정중히 거절하고 펍을 나왔다.

“식 후 디저트로는 너무 자극적이야.”

나는 주눅 든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황갈색 페리온 귀환 스크롤을 찢었다. 오랜만이다! 이, 빌어먹은 울렁증들아.

쓩――타닥.

페리온의 상황도 커닝시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기저기 널 부러진 채 흐르는 붉은 피에 옅은 신음소리를 동반하는 부상자들과 이에 맞춰 날아다니다 시피 분주히 움직이며 부상자들을 돌보는 프리스트들. 코끝을 찌르는 진한 피 냄새에 귀환 스크롤을 쓴 부작용―울렁증―까지 겹쳐 구토라도 신명나게 할 법도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선이와 내가 페리온에 도착한 즉시 한 행동은 긴 한숨이었다. 그래도 부상자들에게 희망을 건네주려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치료에 임하는 프리스트들 덕인지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진 않아 그나마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또한 근접전과 무엇보다 힘에 융통한 전사들의 고향, 페리온이여서 그런지 쾌활한 사람들이 많아 한편에선 피를 콸콸 쏟아내면서도 자신을 치료하는 프리스트에게 농담을 거는 부상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의 상해부위를 쿡쿡, 찌르며 킬킬되는 사람들은… 미친 건가. 신중한 커닝시티의 분위기와는 판이하게 다르달까. 가볍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두렵기도 한 곳이었다. 그랬기에 어서 지인들을 만나고 엘리니아로 이동하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이 역시도 허용되지 않는지 여기 저기 비어있는 천막들만이 바람에 나풀거리며 빨리 떠나가라 외치고 있었다. 민간인들은 일찍이 헤네시스나 엘리니아로 피난 한 것이다.

헤네시스라면 헤네시스 공원 중앙에 떠있는 마나구가 마을 윤곽에 맞춰 실드를 형성하고 있으니 웬만큼 강한 몬스터 이외엔 출입이 거의 불가능 하여 일단은 안전할 것이다. 최근 쇠해진 실드로 위태롭긴 하지만 말이다. 또 엘리니아라면 무엇보다 페어리퀸 레이나 님과 좀처럼 볼 순 없지만 조화의 종족, 엘프들이 버티고 있으니 그 신성한 땅에 감히 일게 몬스터에 불과한 그들이 쉽사리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무례하게 페어리퀸 레이나 님의 영토에서 난동을 부리고 그 땅이 피로 적셔져 페어리퀸 레이나 님의 원한이라도 사게 된다면, 결코 무사하지 못하리.

나는 양 허리에 손을 얹고는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몇몇 눈에 익은 사람들이 반가로이 손짓했다. 의외의 만남에 기뻐 그들에게로 달려가 반가움을 표하려 했다. 이것만으로도 페리온에 온 보람이 생긴 것이다. 저들과 담소를 나누다 주먹 펴고 일어서 님을 뵈면 되겠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일까, 나의 행동은 어느새 빨라져 있었다. 나는 선이의 손을 잡아끌며 달렸… 아니, 달리려했다. 그때 들려온 낯익은 소리만 아니었더라면…….

나와 선이는 멈칫하며 미성이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의 불안감은 최고조에 다다라있었다. 시선이 멈춘 곳에는 무언가 흙먼지를 만들며 우릴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의아스러움에 선이를 바라보니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마치 보면 안 될 무언 갈 보고야 만 사람처럼…….

“선아아아아!!”

소프라노 급의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높지만 아직 어린 아이 특유의 도톰한 목소리를 벗지 못한 목으로 음을 길게 늘여 트린 외침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대상은… 엑? 선이? 선이는 자욱한 흙먼지 속을 헤치고 달려오는 그 ‘무언가’를 응시하며 이까지 맞부딪치면서 덜덜 떨었다. 선이가 그런 과장된 행동을 보이자 은근히 불안해진 나는 몬스터 인가 싶어 표창을 던질 자세를 취했지만 관두기로 하였다. 사람이었다.

엄청난 스피드로 다가온 그것은, 흡사 황무지에 피어난 분홍색 꽃잎을 연상케 하는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세차게 달려오는 이얀이었다. 헤네시스 마을에 사는 브루스 씨의 외동딸인 그녀는 어릴 적 행방불명되어 아무것도 모른 체 페리온에서 자라나, 얼마 전 우여곡절 끝에 브루스 씨와 감동의 재회를 하여 큰 이슈가 된 전적이 있는 소녀였다. 첫 만남 때 이얀이 특히 뼈가 약한 호리호리한 브루스 씨의 정강이를 걷어찼다가 어이없게도 브루스 씨의 정강이뼈가 부러져 버렸던 일로 ‘불운의 아버지 브루스’로 낚인 찍힌 것도 하나의 큰 얘깃거리였다. 브루스 씨는 그 일로 더 소심해져버렸지만, 어쨌든 몇 년간 떨어진 일로 뼛속까지 무골이 되어버린 당찬 소녀였다.

송글송글한 땀방울을 떨어트리며 활짝 웃는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몇몇 프리스트들이 얼굴에 홍조를 띠고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으나 이얀을 오로지 한 인영이 서 있는 곳, 즉, 나와 선이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얀이 왜 여기로 오는 거야?”

미심쩍게 묻자, 선이는 내 말을 ‘출발!’이라는 신호로 인지했는지 으아악, 비명을 지르며 죽어라 달리려 했으나……. 덥석,

“선아~”

그만 이얀이라는 작자에게 허리춤을 잡혀버렸다. 좀 더 빨리 알려줄걸 그랬나. 이얀은 선이의 허리춤을 잡자마자 다리에 힘을 뺏는지 선이가 힘겹게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마치 불필요하게 붙어버린 꼬리처럼 이얀의 두 다리가 질질 끌렸다. 선이는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 이얀의 모습에 기겁하며 외쳤다.

“이거 놔줘요!!”

이얀은 허리를 붙든 자신의 팔을 빼내려 안간힘 쓰는 선이를 보며 더 힘껏 손에 힘을 주었다.

“싫어~”

이얀은 콧소리를 내고는 점차 선이 몸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선이는 그 반동으로 인해 사체를 굽혔다 폈다를 반복하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린 니임!!”

순간 이때다 싶었던 나의 사악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씨익, 난 최대한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스멀스멀 뒤쪽으로 물러났고, 선이는 울부짖었다. 나 몰라라~ 였다.

“너무해요!!”

선이는 나를 향해 끈임 없이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오다가 이내 내 사악한 미소에 져버렸는지 자신의 힘으로 이얀을 떼어놓느라 갖은 애를 썼다. 그 대신 이얀의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가 선이의 허리를 조른 건 두말할 것도 없다.

음, 드디어 생각나는군! 나는 손바닥을 한번 쳤다.

이얀은 지난 트윈 문 축제 때 생긴 열렬한 선이의 추종자 중 하나였다. 그 후 질려버린 선이 산속으로 들어가 몇 달 간 행적을 감췄을 당시 꿈속에서 깨어난 대부분의 소녀들은 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으나 이얀 만큼은 그의 무관심에도 꿈쩍하지 않고 여전히 그의 뒤꽁무니를 쫓고 있었다. 그나마 여지 것 남은 추종자들이야 뒤에서 몰래 훔쳐보며 얼굴을 붉히는 선에서 끝내었지만 이얀은 적극적인, 선이 생포에 나선 것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페리온에는 웬만한 일이 아니 에서야 가지 않고, 원로원에서 내려지는 그에 관련된 임무 또한 마다하던 그였다. 허나 오늘에서야 그 뒷덜미를 잡히고 말았군. 아아, 한 가지 덧붙일 사항이 있다면 기어코 선이를 보겠다, 페리온 밖으로 나왔을 적 몬스터와 대적 중이던 선이를 발견하고 달려가는데 그때 무심코 차버린 돌멩이가 마침 뒤에서 알렉스를 공격하려던 몬스터의 눈에 작렬! 그대로 위험한 처지에 놓여있던 알렉스의 생명의 은인이 된 이얀은 ‘설마 네가 날 마음에 품고 있을 줄은 몰랐어, 이얀.’으로 시작되어 온갖 니글거리는 말을 주저리 늘여놓고, ‘좋아, 내 특별히 너와 교제해 주겠어.’라고 윙크까지 날리면서 말하는 알렉스의 안면에 친절한 펀치를 과격! 평소 잘난 얼굴을 들이밀던 알렉스의 면상에서 두 줄기의 피를 받아 내니 이를 그 유명한 ‘피의 쌍코피 사건.’이라 일컫는다.

어험, 어쨌든 그녀의 화려했던 지난 일들은 잠시 덮어두고, 어느새 선이에게 업히다 시피 매달린 이얀은 나를 힐끔 보더니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넌 뭐야?”

날이 선 그녀의 말투에 움찔한 나는 혈압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말의 함축적 의미를 풀어 말해보자면, ‘어째서 너 따위가 선이와 같이 다니느냐. 네가 암만 그래 봐도 선이는 내 것이다. 넘볼 생각하지 마라라.’라는 둥의 이야기였다. 발끈한 나는 간만에 솟은 빠직 마크를 매만지며 자기소개를 해주었다.

“인간.”

“…….”

나는 할말을 잃은 이얀을 보며 오른손을 가슴에 짚고는 감동에 차올랐다. 이얀은 아예 상종을 하면 안 되겠다 판단했는지 양 볼을 부풀리며 고개를 획 돌려 걱정 어린 목소리로 선이에게 물었다. 목… 안 아프려나?

“선아, 오시리아 원정 간다면서? 힝, 다치면 어째.”

이때로군! 이때를 위해 버텨왔던 게로군! 나는 속이 뒤집힘을 느꼈다. 식후 써버린 귀환 스크롤의 울렁증과 피 냄새, 징글징글한 상해들, 그 밖에도 묵혀왔던 음식물들이 식도동굴을 타고 입을 통해 새로운 자태를 뽐낼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드는데? 나 참, 힝 이란다 힝~ 자기라 무슨 말인가? 히이힝~거리게? 나는 이 순간 급속도로 피어나는 선이를 향한 동정심을 느꼈다. 겉은 괜찮아 보여도 속은 녹고 있으리라. 그럼 이쯤에서 구해 줄까나.

내 머릿속에 두개의 의견이 심각한 격돌을 벌이고 있을 때 즈음 선이가 떨리는 목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괘, 괜찮아요. 저만 가는 것도 아닌데요, 뭘. 강성하신 두 동행자분들이 곁에 계시는 한 별다른 일을 없을 거예요.”

그럼, 그럼. 누가 같이 가는데. 선이의 말에 괜히 기분 좋아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가려 땅에서 떼었던 발을 다시 내려놓았다. 저 둘… 다시 보니 은근히 하는 짓이 귀엽단 말이야. 후후, 좀더 지켜보도록 할까나.

아아, 역시 나는 사악했다.



나는 마음을 고쳐먹기로 하였다.

감히 잠자는 드레이크의 코털을 건드려? 이상한 쪽으로 자존심이 센 나는 눈을 부라렸다. 이얀의 결정적인 한 마디가 내 실금(?)을 울렸기 때문이다. 다른 수식어나 어휘, 어조 따윈 상관없었다. 내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단어는 단 하나. ‘짐 만 되잖아.’

내가 이얀에 대한 안면도, 그렇다고 아는 것도 별로 없다만, 이건만은 장담할 수 있다. 난 저 앙큼한 것보다 확실히 강하다!! 네가 세고, 내가 세고, 할 문제는 분명 유치한 어리아이들의 논리에 불과하지만, 난 **이 처음 입을 뗄 때, 난 완벽한 문장을 고수했고, **이 처음 걸음마 뗄 때, 난 이미, 100m 달리기를 하며 돌아다녔단 말이다! 그뿐 만이냐, **이 하급 임무를 맡을 때, 난 중급이었고, 중급이었을 뗀, 난 상급 임무를 맡았었다. 자랑은 더더욱 아니지만 결정적으로 헬레나 님이 이얀 대신 날 원정에 보낸 걸 보면 알만하지 않는가.

나와 이얀 사이엔 불꽃 튀는 전율을 흘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 머리에 이상야릇한 스위치가 켜졌으니, 나의 잔꾀가 빛을 바랐다. 이것을 훗날, ‘삐까번쩍한 잔꾀의 반란’이라 칭해도 좋으리. 내 머릿속에 잔꾀가 구체화 되자, 나는 픽, 웃으며 선이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기 시작했다.

“선아~?”

난 최대한 고음의 목소리로 선이를 불렀다. 내가 생각해도 무척 낭랑한 목소리였다.

이른바 ‘다짜고짜 화내고 쥐어 패기 작전!’ 이 작전은 다행인지, 우연인지, 혹은 필연인지 페리온 전속인 그녀가 나와 선이와는 달리 마을 귀환 스크롤을 지급받지 못한 것을 전적으로 이용한 방법이었다. 단, 이 작전의 경우 같이 이행하는 상대―선―의 눈치가 없으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나, 성공할 시의 효과는 100배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내 계획은 즉, 이러했다.

먼저 이얀이 계속해서 날 헐뜯도록 이얀을 부추기는 것이다. 당연, 나의 성격상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두고 볼 순 없다. 점차 각색되어가는 화를 겨누지 못한 나는 선이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화를 떠넘긴다. 결국 절정에 이른 난 선이를 향해 칼날 품은 선물을 선사하고, 선이는 그것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엘리니아 귀환 스크롤을 찢어 대피하는, 뭐, 그런 스토리다. 단순하다면 단순한 작전일지 몰라도 이얀에게 쓰면 상황은 달라진다. 거듭 강조하지만, 그녀는 선이의 열렬한 추종자다.

나는 이 작전을 실전으로 옮기기 전, 이얀의 눈을 피해 선이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선이는 잠시 당황한 듯 날 쳐다보다가 비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구나, 선아. 약·한 내가 가서.”

난 여태껏 살아오면서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자조적이면서 가장 밝아 보이는, 이중의 성격을 띤 미소를 지어 보였다. 효과는 그야말로 직빵! 선이는 이마에 큰 땀방울을 매달고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쿡쿡, 그래, 그래. 지금 눈치 채고 있는 거 맞지? 후후, 거기다 그 귀여운 이얀이란 것은…….

“흥! 맞는 말이잖아. 네가 가면 우리 선이만 고생할게 뻔하다고! 무슨 방법으로 선이를 꾀어냈는지는 몰라도 선이는 너한테 눈길 한번 안 줄걸!”

나는 이얀의 말에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고자 입술을 마구 비틀었다. 저 말은 내가 선이에게 흑심이라도 품고 동행에 나섰다는, 그런 얘기? 푸하하하!! 오, 이런. 푸히히히!! 난 계속 헛숨을 들이켰고, 결과 더한, 미친 놈 취급을 받는 영광을 얻었다. 후엔, 배와 눈이 아팠다. 이얀은 내 노돈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거봐! 핵심을 찔렀지? 선아, 그리고 저 계집애 머리가 어떻게 됐나봐. 아무래도 수상하다고. 그러니까, 정말, 정말, 나 데려가면 안돼?”

“아… 저기.”

선이는 내 웃음의 의미를 어느 정도 짐작했는지 선이는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그러나 들려오는 이얀의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쩔쩔맸다. 아니, 그게 아니라 실상 선이는 떨고 있었다. 안 그래도 체력이 약한 데다 후리후리한 그가 잠깐도 아니고 장시간 이얀의 무게를 견디고 있었으니, 그의 다리가 후들거리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여하튼 지나가던 옥토포스가 웃을 만한 말을 건네받은 나는 선이의 상태를 보며 시간을 더 끌어선 안 되겠다, 생각하며 슬그머니 뒤주머니에서 금비 표창을 하나 꺼내들고는 눈을 번뜩였다.

“선아? 옛말에 부부는 일심동체라지? 미워하렴, 네 옆에 찰! 싹! 붙어 있는 저 작자에게 하려구나.”

이얀은 ‘부부’라는 말에 함박웃음을 짓다가 내 손에 들린 표창을 보곤 눈을 크게 떴다.

“아니에요!! 오해 말아요!! 린 님이 얼마나 강한 데요!”

난 새삼 선이의 연기력에 감탄하며 싱긋 웃었다. 그리곤 손목을 오므렸다 피며 금비 표창을 날렸다. 내 금비 표창은 시원스레 바람을 가르고 목표물을 향해 날아갔고, 선이는 코앞까지 다가온 금비 표창을 보고는 울며 겨자 먹기로 초록색 엘리니아 귀환 스크롤을 찢어 엘리니아로 무사 귀환하였다. 목표물 잃은 금비 표창은 온 몸으로 모래 바람을 맞닥뜨리며 삭막한 페리온 바닥에 꽂혀버렸고, 동시에 선이에게 매달려 있던 이얀이 낙하하였다. 쾅, 아코.

안전하게 선이를 대피시킨 나는 만족스럽고, 또 고소하단 얼굴로 이얀을 바라보았다.

“우아앙!! 우리 선이 너 때문에 가버렸잖아! 빨리 데려와앗!!”

방금 전에도 그랬지만, 언제부터 ‘우리 선이’야? ‘우리 선이’는. 일어날 생각은 도무지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훌쩍이는 이얀을 보고 있자니 짜증이 밀려왔다. 이거 몸만 컸지 완전 어린애잖아. 나는 이러다 아직 파릇파릇한 이 나이에 고혈압으로 생을 마감하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고려해보다가 곧 이것이 무의미한 것임을 깨닫고 이얀을 향해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 해주었다.

“조용히 하렴 아가야.”

난 선이의 뒤를 이어 엘리니아 귀환 스크롤을 찢어 엘리니아로 귀환했다. 찰나의 딸꾹질하는 이얀의 모습이 얼핏 보였는데. 꽤 살벌했던 모양이지?

또한 원래의 계획대로 원로원으로부터 귀환 스크롤을 지급받지 못한 이얀은 우리의 뒤를 쫓지 못하였다.


타닥.

엘리니아에 두발을 살며시 올려놓은 나는 그 자리에서 주변을 둘러보다 구석에 웅크려 있는 선이를 발견 할 수 있었다. 나는 경건하게 그에게 다가갔고, 한 층 핼쑥해진 얼굴로 입을 막고 있던 선이가 나임을 알고는 입을 열어,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했다.

“속이 울렁거려요.”

나는 경건하게 그의 등을 두들겨 주었고,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냐.”

이리하여, 페리온을 둘러보는 것을 포기한 선이와 나는 마침 엘리니아에 피신 중이던 몇 지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해가 지기까지 그들과 여러 얘기를 나눈 나는 근래에 집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이카루스의 소식에 입을 다물었다. 급히 이야기를 끝마친 나는 반대편에 서있던 선이와 함께 나무가 우거진 풀숲에 적당히 모포를 깔고 누웠다. 노숙인 것이다.

페어리퀸 레이나 님의 영향인지 배타적 성향이 강한 엘리니아엔 가구 수가 몇 안 되거니와 실질적으로 엘리니아에 올 기회가 몇 안 되었으므로 지인을 심어 놓지 못한 일 때문이기도 했다. 선이도 마찬가지였고. 그나마 초기 땐 이곳에 ‘정거장’이 세워질 만큼 발달도 빨랐고, 빅토리아 대륙도 이곳을 중점으로 오시리아 대륙과 교류가 활발했으나, 어느 순간 마을의 자물쇠를 채워 버린 것을 계기로 더 이상 오시리아 대륙과 무역도 통신사절도 파견하지 못했으며, 또 오지도 않았다. 이것으로 빅토리아 대륙은 완전한 독립을 이룩했지만, 발달은 현저히 무뎌졌다. 설강가상으로 그 당시 원로원 측도 별말하지 않아, 빅토리아 력 57년 경, 빅토리아와 오시리아 대륙은 각자 갈림길에 서게 된 거다. 지금에 와서 다시금 오시리아 대륙으로 진출한다는 건 사실상 웃긴 얘기지만, 다 살려고 하는 짓이니, 탓할 수도 없다.

여하튼 그렇게 누워있자니 몇몇 늦은 밤에 원정을 기념하여 축배라도 올리자고 샴페인 몇 병을 들고 왔지만, 술 못하는 나나 선이는 무슨 축배냐 하며, 막무가내로 돌려보냈다. 짐작하건데 내일 아침 숙취다 어쩐답시고 임무 땡땡이 칠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그림자가 드리워 초췌해 보이는 피난 객들이 웃음을 잃지 않았다는 점에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론 안쓰럽기만 할 따름이었다. 평소의 나였다면 그들을 위해 밤새 전의를 불태웠겠지만 관두었다. 줄곧 한 소년이 나의 여러 생각들을 저지시켰다.

어디 아픈 건 아닐까. 밥은 잘 먹고 있으려나. 밤이 무서워 잠을 설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이 민폐만 끼치는 내 작은 친구야.



“하아암.”

“린 님 피곤하시면 눈 좀 붙이세요. 제가 너무 빨리 깨웠죠?”

시원스럽게 하품한 나는 선이를 곁 눈짓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선이는 뱃속에 일정 시간이 되면 잠에서 깨워주는 요상한 게 들어있나 보다. 어떻게 매일아침 같은 시각에 일어날 수 있는 거지? 유독 아침잠이 많은 나는 찬찬히 선이를 뜯어보다 여전히 비몽사몽한 눈을 비비며 시선을 돌렸다. 숲에 둘러싸인 엘리니아와는 달리 드넓은 하늘을 마주하고 있는 엘리니아 정거장은 평화롭고 예뻤다. 흡사, 리스항구와 묘하게 배치될 정도로 모양새가 비슷했는데, 그 옛날 헐은 처소를 재건축 시킨 듯한 아기자기한 처소 하나와 하늘과 맞닿고 있는 길게 뻗은 부두, 그리고 그 정박항에 자리한 작은 배 한 척은 옛 서적에서 보았던 대륙국 초기 상항으로 쓰이던 엘리니아 정거장을 굳건히 지키고 있던 배와 매우 흡사하여, 자칫 그때로 돌아온 건 아닌지 처음엔 잠시 착각할 정도였다. 설마 단 일주일 만에 이렇게 엘리니아 정거장을 재구성해 놓을지는 감히 상상 하지도 못했다.

나는 게 중 한 구석에 쌓여진 짚더미에 등을 기대며 선이에게 물었다.

“선아, 집합시간까진 얼마나 남은 거야?”

다시 한번 한바탕 입이 찢어질 듯 하품을 해대며 선이에게 묻자 선이는 내 물음에 정상을 향해 치솟는 태양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직 해가…….”

나는 신속하게 덧붙였다.

“어흠, 어렵게 말하지 마.”

선이는 내 말에 머리를 긁적이다,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지금이 10시 쯤 된 듯싶으니 앞으로 3시간 남았네요.”

“맙소사. 3시간이나 남았다고?”

선이는 말없이 고개를 까닥했고 난 몸을 돌리고는 지겨움에 치를 떨며 짚더미를 배게 삼아 아예 누워 버렸다. 선이는 이런 날 보며 머쓱하게 웃더니 가방에서 묵직한 책을 꺼냈다. 퉁. 난 엘리니아 정거장을 울리는 둔탁한 소음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 앉았고, 지면에 안착한 책과 선이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너 설마하니 숨겨졌던 초인이라던 가 천하장사였냐?”

“그럴 리가요.”

내 장난 어린 질문에 선이는 간만에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하하’ 웃음을 꺼내며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기도 그건 아니란 의미였다.

“가방에 경량 마법을 걸어놨거든요. 덕분에 가벼워 진거에요.”

오호오라. 그렇게 편한 게 있었단 말이지? 난 감히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선이에게 들이밀었다.

“있잖아~ 선아~?”

선이는 식은땀을 흘렸고, 결국…….



이히힛! 기분이 좋다. 이유인 즉, 선이를 ** 가방 내에 마법을 건 탓이었다. 본래, 내 가방의 무게는 그다지 무겁지 않았으므로, 공간적 여유를 만든 것이 선이의 가방에 걸린 마법과 다르지만, 어떻든 간에, 내가 편하면 그걸로 되지 않겠는가. 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원로원 위원들과 대자누님을 기다렸다. 쨍쨍거리며, 정상에 올라 환희에 찼는지 녹여버릴 듯 강열한 햇빛으로 기쁨을 방출하던 태양도 문득 지침을 느끼고는 새하얀 구름이란 작은 휴식처 안으로 몸을 감추었고, 살랑 살랑 바람이 기분 좋게 불었다. 올 때까지 낮잠이라도 자볼까……. 이따금 팔자 좋은 생각도 해본다.

그렇게 20분가량 지났을까. 엘리니아 정거장 너머로 다량의 발자국 소리가 부둣가를 울렸다. 혹, 원로원 위원님들이 한발 앞서 도착한 건 아닌지 흠칫하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저렇듯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를 낼 연유는 없단 생각에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윽고 엘리니아 정거장에 발을 디딘 것은 한 거대 무리였다. 현재 태양이 구름 속, 단잠을 즐기고 계시니 덕분에 짙은 그림자가 져 그 무리들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또 중간 중간 꺅, 꺅!! 거리는 거대한 표호(?)소리가 들려와 몬스터 인가 싶어 선이와 함께 전투대세를 갖추었으나, 신속해도 너무 신속한 우리 둘의 행동에 멈칫한 거대무리 중 리더로 보이는 한 형상이 거대 무리들에게 다가오지 말라는 의사를 밝힌 뒤 선이와 내 쪽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왔다. 역시 까만색 물감을 덕지덕지 칠해 놓은 듯한 그림자에 정확한 이목구비를 볼 수 없었다. 보아하니 몬스터도, 그렇다고 페어리도 아닌데……. 요모조모 훑어봐도 전혀 분간이 되지 않는 ‘무언가’를 확인하고자 지루함에 짓눌려 표창을 던지려 했건만.

“여어.”

어디선가 낯이 많이 익은 인사법이 내 귓가를 맴돌았다. 말을 하는 걸 보니, 사람이었다. 나는 표정을 풀며, 표창을 내려놓았고, 선이는 맥 빠지는 숨소리를 내고는 그를 반겼다.

“대자형님.”

대… 자형님이라면, 4년 전 하늘에서 뚝 떨어져, 단시간 내에 빅토리아 최고의 검사가 되고, 많은 자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으나, 정신세계가 약간 삐뚤어져 자기를 자칭 엘프라 떠받들며 내 딴에선 영광스런 먹성 앞에 붙여야할 ‘고귀한’, ‘위대한’의 단어를 항상 자기 이름 앞에 붙이라 강요하고,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는 것엔 일등 공신을 하는, 여하튼 미치광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그리고 얼떨결에 오시리아 원정에 동행하게 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 대자누님? 설마하니 이곳을 무덤 삼으려 몬스터들을 끌고 온건 아니겠지? 난 미심쩍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잠깐의 휴식을 만끽한 태양이 다시 따스한 햇살을 비추었을 때 비로소 난 그 거대 무리들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나는 그 순간 당황한 나머지 뒷골을 잡고 뒤로 벌러덩 넘어질 뻔했다.

그 거대 무리는 다름 아닌 소녀 부대였다. 약간 특이한 점을 따지자면 간간히 소년들이 섞여있단 정도? 나이는 소녀, 소년의 호칭에 걸 맞는 대부분의 십대였고, 몇몇 그 이하나 이상의 연령층들도 눈에 띄었다. 보아하니 그 짧은 기간 동안 착, 한, 짓, 을 토대로 자신의 ‘팬 무리’를 결성한 듯싶군. 더 웃은 것은 그 대자라는 것이 이런 열광적인 팬들의 모습에 당연하다는 듯이 살짝 손까지 흔들어 보이며 히죽 히죽 웃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마냥 열혈하다 못해 광적인 대답을 건네받을 수 있었다.

“꺄아악!! 오빠, 이쪽이에요, 이쪽!!”

“오빠!!! 사랑해요!! I love you!!!”

“우어엉!! 대자오빠~, 가지 마요!!”

“맞아요, 맞아. 가시면 저흰 살아 갈 낙이 없어진단 말이에요!!”

“이젠 누굴 보며 살아가란 거예요! 우아아앙!!”

“훌쩍, 대자… 형님. 안 가시면 안 될까요?”

“형님. 형님 곁엔, 언제나 저희가 있습니다!”

“외롭고, 힘들 때면 저희를 기억하십시오, 형님!”

중간에 한 덩치 큰 소년이 머리위에서 하트를 날리자 잠시 얼굴에 경련을 일으켰던 대자누님이었지만, 마냥 좋다며 실없이 웃어댔다. 물론 좋아 라~ 하는 것은 대자누님이나, 눈물을 찔끔찔끔 흘려대는 팬 무리에게나 해당될 일이지, 나나 선이는 그 열광적인 외침들에 두 손으로 귀를 봉하며 괴로워했다.

**, 이것도 소음공해다. 난 찡하게 울리는 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수두상기했다. 어쩔 수 없군. 나는 주먹만한 한숨을 내 뱉으며 손을 오므리며 손목을 한바퀴 굴렸고, 내 손 주변에 흑색의 마나가 회오리처럼 휘몰아친다 싶더니 점차 그 형태를 만들어 갔다.

“…이튠.”

내 부름에 응한 이튠은 펴진 내 손바닥 위에 완전한 형체를 드러냈다. 생긴 건 영락없는 유령―달걀 같은 모양에 다리대신 꼬불거리는 꼬리 비스무리한 걸 단―같은데 새까맣고 눈**와 입이 흰 것이 마치 악령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나로선 그가 누구보다도 친숙하고, 내 자식 보듯 귀여울 따름이지만 말이다. 난 다른 손으로 이튠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응해줘서 고마워, 이튠. 다름이 아니라, 저기 좀 조용히 시켜주겠어?”

이튠은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내 그림자 안으로 사라졌다. 난 피식, 웃으며 여유 있게 소음무리(으흠, 시끄럽잖소.)를 바라보았다. 일순간 내 손바닥위에 올려놔도 무방한 크기의 이튠이 그 거대한 소음무리를 한 순간에 덮칠 듯한 크기로 변하더니 소음무리들에게 위협을 가했다. 그저, 우어어어!! 거리는 게 전부지만 느껴지는 기(氣)로 상대방을 짐작하는 몬스터에겐 꽤나 효과적인 공격방법 중 하나였다. 소음무리들은 예상치 못한 기습에 놀라 찍소리도 못하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 선이도 이제 좀 났다는 듯 귀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위협이로군요.”

그래, 위협이다. 하지만 선이의 말엔 많은 함축적 의미가 담겨 있다. 내가 도적이면서도 위협을 가진 이유에 대해 한 번 더 회상한 바일 것이다.

실상 ‘위협’은 특정한 가문이 아니면 지닐 수 없는 것이었다. 옛, 숲 속 가문이라 일컬어지던 ‘에리노’가문이 그것이다. 현재에는 그 대가 끊기고, 사라진 것으로 알려있지만, 전** 때에는 감히 원로원조차 어찌 하지 못했던 강성한 세력이었다. 대대로 물, 불, 땅, 공기의 4원소를 토대로 한 마법과 그 속성을 부여하여 검을 잡는 ‘마검사’를 배출하던 가문으로 유명했다. 그래, 유명했다. 전에 말했듯 이제는 대가 끊겼다. 내 부모님을 끝으로. 왜냐, 묻는 다면, 나도 모른다. 가문이 몰살당하던 때에 내가 기억나는 것은 휘몰아치는 강한 태풍과 검은 하늘, 그리고, 살아가라는 말 한마디와 어느 따스한 품이었다. 그때 내 나이 5세였으니, 기술을 전수 받지 못한 것이 당연했다. 항간에는 어딘가에서 다시금 전**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거나 빅토리아 대륙국을 뒤엎을 계획을 짜고 있다고 소곤닥거리지만, 역시 확인 된 바 없다. 아니, 그럴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혹은 그, 그 다음 미래에도. 이미 끝났으니까.

뭐, 위협은 생애를 갖은바 동시에 명의 기운을 타, 어둠 속에서 이끌려오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받을 수 있어 해당되진 않지만 말이다. 또 위협이야, 말 그대로 적을 위협한다며, 선조들이 붙인 이름이지만, 그런 작명센스 하나 없는 선조들이 붙인 옛 이름은 잠시 묻어두고 나는 새롭게 ‘이튠’이란 이름을 붙여준 거다. 예전엔 너도나도 모두다 이튠을 ‘위협’으로 불렀으니, 그것을 구별하기 위해 위협1, 위협2, 위협3… 등으로 불렀다는 풍문도 있다. 그래도 선이보단 사정이 나으니, 그 앞에서 하소연 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한 빈민가의 자식으로 태어난 선이는 알코올중독자인 그의 아버지와 품팔이 하는 어머니의 밑에서 자랐다. 그가 3살이 되던 해에 그의 어머니는 집을 뛰쳐나갔고, 그는 그의 아버지에게 심한 가정폭력을 겪어야만했다. 보다 못한 마을 사람들이 선이를 집밖으로 데려왔고, 기껏해야 네 살배기인 그를 똘똘하게 생겼다며, 듀스피앙 엔셜 씨가 그를 제자로 삼은 것이다. 얼마 뒤 들려온 건 그의 아버지가 목매달고 자결했단 소식이었고, 어머니는 행적을 감추어 거처불명이 된지 오래였다. 어린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슬픔을 잊기 위해 무언가에 미친 듯이 매달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것이 마법이었다.

스승, 즉, 듀스피앙 엔셜 씨 밑에서 마법을 배운 선이와는 달리, 나는 헬레나 님의 손에서 자라났으나, 바쁜 그녀로 인해 6살에 빅토리아 아일랜드로 보내져 헬레나 님의 뜻에 따라 활을 쥐었지만, 얼마 안 되어 파격적이고 세련된 도적의 매력에 심취해 직업을 급히 바꾼 것이다. 이쯤 되면 대자누님 얘기도 나올 법 하지만 부디 묻지 않길 바란다.

어찌됐든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 난 다시 드러누워 창창한 하늘을 바라보았고, 선이는 읽던 마법서를 마저 읽기 시작했다. 대자누님은… 울먹이는 팬들의 표정에 곤란해 하고 있다. 그거, 쌤통이로군.

참으로 평화로웠다. 온 세상은 고요하였다. 곧 있음 박진감 넘치는 원정의 시작이었지만, 그 사실을 망각하게 할 만큼 평화로웠다. 이런 매치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이성보단 본능이 먼저 요동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잠시 뒤, 원로원이 엘리니아 정거장에 도착하였다.

조촐하게나마 식을 올린 우리는 간단한 인사와 함께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빅토리아 대륙을 밟으라는 당부의 말을 건네받았다. 분위기는 무척 숙연했고, 잠잠했지만, 얼토당토 얼굴을 비친 내 지인들에 의해 무참히 깨지고 말았으니.

“영광스럽게 죽어라!”

“다음 생에서 만나!”

“무슨 일이 있어도 이 형님이 시체만은 거두어 주마.”

“무섭다고, 뒤에서 질질 **나 말라고.”

등의 말로 인해 쾌도난마하려는 내 표창을 여러 심오한(?) 포즈로 피하게 되는 기괴한 현상까지 일어났다. 덕분에 분위기가 한층 누그러트려졌지만, 긴장이 풀어지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이었다. 선이의 스승님, 듀스피앙 엔셜 씨는 그의 말에 충실했고, 이별 따윈 나누러 오지 않았다. 그러나 실망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그의 얼굴은 여느 때보다도 평온해 보였다. 반면 대자누님은 사랑스런 팬들과의 가슴시린 이별을 나눴고, 금세 엘리니아 정거장은 통곡하는 소리로 뒤덮어졌다. 이런 제각기 이별의 시간을 가진 우리 셋은 이 일의 총 책임자인 헬레나 님의 세례식을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배 위에 오를 수 있었다. 대자누님의 짐이 생각보다 많이 무거워, 배 안에 싣는데 낑낑됐다는 것만 빼면 매우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헬레나 님, 에이미 좀 부탁드려요.”

배 위에 타기 전, 그렇게 헬레나 님께 부탁하고는 배 위에 올랐다. 헬레나 님은 맡겨만 두라는 투로 웃어보였고, 역시… 이카루스는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400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 단선이 ‘부우웅―’하는 뱃고동 소리와 함께 하늘을 향해 붕,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늘 위로… 하늘 위로… 높이, 높이 날아올랐다. 이 배는 이제부터 잊혀진 하늘 뱃길을 따라, ‘하늘 섬’이라 불리 우는 오시리아 대륙까지 갈 것이다. 멈추지 않고, 오직 한 도착점을 향해, 달리고, 또 달릴 것이었다. 긴장과 두근거림으로 여러 부분적 감정들이 한데 엉켜, 답답한 기분이 들었지만, 여전히 한 구석은 싸늘하게 비어있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엘리니아 정거장에서 우릴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그들 개개인의 감정을 읽을 만한 능력은 내게 없지만, 오시리아 원정의 성공에 대한 염원이 깊이 베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엘리니아 정거장이 작아지고… 엘리니아 전역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열쇠는 자물쇠 옆에 있겠지.

고즈넉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 열쇠를

소녀는 찾아 떠났다.


푸르게 자라난 나무들 사이로 어린 인영이 보였다. 그 인영의 눈가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버거워 보일 정도로 그 어린 인영에겐 무거워 보이는 붉은 빛이 감도는… 원숭이 한 마리를 안고서. 청색 모자가 땅에 떨어진 줄도 모르고, 바람에 살랑 이는 진한 검은 머리카락을 내 보이고서. 쭉… 이곳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아직 다 헤어 나오지 못했을 찌르는 아픔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한사람을 위해.


이따금 배의 고동소리

들려오거든,

잊지 말고 기억 하 거라.


뺨이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대견스러움, 또는 미안함. 결코 사사롭지 않은 감정. 서글픔에 다리에 힘이 빠져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싶었다. 다리가 후들 후들 떨렸다. 아니, 다리뿐만 아니라 온몸이 떨렸다. 흡사 수전증에 걸린 손처럼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입을 막고, 행여나 놓칠세라, 그 어린 인영의 위치를 따랐다.


언젠가 돌아올

그날을 기약하고,

반드시 살아 돌아 올 것을

약조해.


“…이카루스.”


이 땅은 소녀의 향을 기억하고,

소녀의 발자국과 웃음소리를

기억하겠지.


힘겹게, 내 뱉은 그 인영의 이름이 이토록 그립고, 슬펐던가. 이어, 그 인영마저 하나의 검은 점이 되어 사라졌을 제, 붉어진 눈으로 고개를 돌리자, 대자누님이 눈을 크게 떴다, 바로하며 능청스럽게 물었다.


떠나거든,

아아, 떠나거든.


“에리노. 설마, 벌써부터 무서운 건 아니겠지?”


지금 잡은 그 손놓지 말고,

길 잃은 어린 양 마냥

방황하지 말고,


난 두 손으로 눈가를 한번 훔친 뒤, 말없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이어진, 나의 힘 있는 목소리엔 비장함이 짙게 가라 앉아 있었다.


오로지 한 착처를 향해,

슬피 우는 새가 있는 곳.


“이루기 전까진 돌아오지 않을 거야. 죽지도, 실패 하지도 않아. 살아서, 이 땅을 다시 밟을 거야.”


가녀린 손잡고,

애성담긴 넋 달래러,

깊게 안아줄 수 있도록.

나는 그렇게 말하며, 대자누님의 뜻 모를 미소조차 감지하지 못한 채, 뒤 돌아서며, 이제는 한눈에 들여다보이는 빅토리아 대륙을 보았다. 그 옛날, 빅토리아 아일랜드와 빅토리아 대륙을 돌아다녔을 때를 생각하면, 하늘을 나는 배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리 키가 컸고, 어깨는 한층 무거워졌다.


달리라고,

그저 달리라고.


그래,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지금도 계속 되고 있을 수많은 사람들의 모험, 혹은 여행! 그 많은 시간 속 나의 모험은 이제 막 시작 됐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렇게.

소녀는 떠났다.



=============================Special================================

그날은 드디어 빅토리아 아일랜드에 온지 어느덧 8년이란 시간이 흘렀을 무렵이었다. 가족을 잃었단 슬픔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고, 감정 또한 많이 옅어져, 대인관계가 어느 정도 완만한 틀을 잡기 시작하였다. 생각보다 이것은 꽤나 중요한 사실이었다. 본디 빅토리아 아일랜드는 빅토리아 대륙에 딸린 조그마한 섬이었는데, 빅토리아국 주민들은 대게 이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며, 학교에 다녔다. 주말은 빅토리아 대륙으로 넘어가 집에서 보내지만, 평일엔 이곳에 딸린 기숙사에서 지냈다. 보통은 빨라야 8세에 들어와 15세에 졸업하기 때문에 나의 경우, 유독 빠른 셈 이었다. 또한 그 전에는 평소 숲을 뛰어다니며 알게 모르게 뒤받쳐주는 체력을 길러왔으므로, 또래에 비해 강성할 수밖에 없었고, 본래 ‘에리노 가문’자체가 매우 폐쇄적 이여서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밖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에 마을 각지에 그다지 좋지 않은 소문이 나돌아 그것들을 듣고 자라온 애들로선 쉽사리 다가올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덕분에 알 수 없는 나와 타인사이에 유대감이 생겨, 그럴싸한 친구를 사귀지 못한 상태였다. 필히, 훗날 빅토리아 대륙으로 넘어 갔을 시, 이때 사귄 지인들이 평생의 친구로 남기도 하거니와, 원로원의 임무를 맡았을 시 대게 짝을 이뤄 행동하므로 손발을 맞춰줄 동료로써, 혹은 어느 정도의 안면을 기르기 위해서도 중요했다. 그래도 어렸을 적엔 한 귀여운 꼬마 녀석이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긴 했는데 말이지. 여하튼 간에, 별달리 내가 사귀려 부단한 노력을 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거부하는 법도 없어, 이젠 저쪽에서 조금씩 다가오고 있는 추세였다.

근래에 들어 어려웠던 새 기술을 익혔단 기쁨도 잠시, 다른 기술을 익혀, 더욱 강해져야겠단, 그런 기특한 생각은 애당초 없었고, 그런 생각을 내가 하기엔 아무래도 많이 모순적이었다. 비온 뒤 맑게 갠 하늘을 보며, 이렇게 지루한 이론 수업을 듣고 있어야 하나, 란 고리타분한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날, 급히 연락을 받고 수업 도중 나가신 선생님을 뒤로 한 채, 슬그머니 밖으로 빠져 나왔다.

한 두 번이란 단위성의존명사는 이미 버린 지 오래. 이젠 상습적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수업을 땡땡이 치고 버섯마을 근방에 있는 숲으로 슬쩍 도망 나왔다. 나 혼자 개인적으로 숲 속에 들어서는 건, 헬레나 님에 의해 금기시 되어왔건만, 그 한 가닥의 미련을 못 버린 채 여전히 숲을 찾는 나였다.

사박사박.

비온 뒤라 그런지 한층 상쾌해진 풀 밟는 소리는 어느새 하나의 리듬이 되어 내 귀를 즐겁게 했다. 나는 입만 방긋 웃고는 신발에 헤이스트 마법을 걸었다. 달리는 것이다. 이 숲을. 숲 속 어둠을 꿰뚫는 여러 빛줄기들 사이로 바람을 가르며 달렸다. 그 전, 작은 실수로 자르는 바람에 어깨에 달 듯 말 듯, 짧아진 오렌지 빛 머리카락이 뺨을 때리며 허공에 날렸다. 막연히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한 망상에 젖어 들며, 절대 이 느낌을 지워버리지 않겠노라, 다시 한번 다짐했다. 외톨이였던 상황(그런데 외톨이라고 느낀 적이 있었었나?)에서도 이 숲만은 내게 친근하게 다가왔다. 이때만큼은 삶이 즐겁고, 내 존재의 의미를 다시 한번 밟게 된다.

풀잎에 맺힌 물방울들이 밝은 햇살에 반짝였다. 물기를 머금은 꽃잎은 더욱 싱그러웠고, 후각을 자극하는 풀냄새에 기분이 좋았다. 나는 숲을 한바퀴 돌아 본 뒤 숨을 고르며 당연하다는 듯 숲 한 가운데에 자리한 나무에 몸을 기대었다. 어른 세 명이 손을 붙잡고 두 팔을 벌려야 할 만큼 밑동이 큰 나무였다. 하늘은 맑았고, 햇빛은 가슴 안 팍 까지 햇빛을 빌려주었다. 나른한 기분에 그대로 눈을 감았고, 깊이 잠들었다.

청량한 바람이 어린 새싹을 어루만지는 소리, 아기 참새들이 배고파, 지저귀는 소리, 풀잎 끝에 매달려 고군분투 하던 빗방울 들이 웅덩이에 퐁당, 낙하하는 소리. 이런 여러 자연의 소리들이 하나가 되어 공명하였다. 나는 기다랗게 뻗은 풀대를 잎에 문 체 깨끗한 공기가 몸 안 가득 채워지는 기분에 절로 미소 지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것일까. 주위는 고요하였고, 심지어 엄숙하기까지 했다. 돌아가면 죽도록 맞겠구나. 이것하나만 확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화장실 청소만은 싫은데. 하지만 느껴지는 안락함에 후회를 느낄 새도 없었다. 나는 깊게 심호흡을 한 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가벼운 몸짓으로 기지개를 한번 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그러려 했다.

“으갸갸갹!!”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의아함에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비명소리는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잠결에 환청이라 단언하며 내 한심함에 피식 웃고는 괜스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어느 푸른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다 싶더니, 푸억, 우당탕탕! 기괴한 소음과 함께 흔히들 말하듯, 내 필름은 끊겨버렸다.

시간이 흘러, 흘러, 다시금 눈을 떴을 땐 붉은 노을이 세상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야야야야.”

깨어나 몸을 반쯤 일으키니 머리가 심히 조아렸다. 무의식중에 머리를 짚으며, 무언가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며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내가 왜 여기 누워있지? 무슨 일이 있었더라? 알고자 하는 것이 확고히 윤곽을 잡자, 기억은 일사처리로 꼬리의 꼬리를 물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지루한 이론 수업. 헤이스트 마법을 건 신발. 가르는 바람결. 따스한 햇살과 달콤한 낮잠. 그리고 숲의 공명. …들려오는 비명소리와 올려다 본 맑은 하늘…….

“……!!”

순간 머릿속을 스친 한 장면에 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시늉을 하던 나는 마침 석양빛을 마주하고 있는 한 여인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본래는 금발인데 석양에 붉어진 긴 머리카락을 바람에 맡긴 여인. 바람결 따라 찰랑이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무척이나 가늘고 부드러워 보였다. 실로 신비로워 보이는 여인이었다. 나는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나지막이 여인을 불러보았다.

“저…, 저기.”

여인은 내 목소리에 흠칫했는지 목소리가 있는 곳, 다시 말해, 뒤를 돌아보았고, 기억 속의 푸른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마주침은 길었고, 맥박은 빨라졌다. 여인은 마치 내 속내를 들어다 보고 있는 것처럼 조용히 내 눈을 응시하다, 이내 슬픈 표정을 지었다.



*          *          *



해는 어느새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배는 구름 위로 올라와 안전한 항해… 아니, 항공 중이었다. 처음 선이가 마법석을 통해 하늘을 나는 배를 보며 플라이 마법이 어쩐다, 자의로 길을 찾고 있다, 어쩐다, 하며 조잘조잘 대고는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배 안을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것을 한심하다 느끼며, 고개를 돌렸을 적. 저물어가는 태양과 보드라운 바람결에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하나의 추억에 나는 연신 입을 막으며 킬킬댔다. 이런 날 보며 대자누님이 드디어 미쳤냐며, 언덕 위에 하얀 집에 친히 요양을 보내준다고 설교를 늘여 놓았지만, 그저 어처구니없어 허허, 대던 나는 언뜻 본 대자누님의 당황한 얼굴에 웃음을 주체 못하며 내가 회상한 바를 말해주었다.

“뭐?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고 있었다고?”

나는 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의 침묵을 즐긴 대자누님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더니, 그만 박장대소하였다.

“푸하하!! 아이고!! 배야!! 생각난다, 생각나. 너 그때 나한테 천사냐고 물어봤었지? 푸하하!! 아아, 배야!!”

난 얼굴을 화끈 달아 올리며 반박했다.

“그러니까 남자인 주제에 누가 머리를 기르래? 얼굴은 곱상하게 생겨 갖고는. 아아, 왜 내 주위에는 남성미가 넘실넘실 넘쳐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야!! 이씨, 게다가 석양빛을 샤랄라~(?) 받고 있는데 착각하는 건 당연한거 아냐?”

“쳇, 그래서 잘랐잖아!! 너 내가 그때 얼마나 상처 받았는지 모르지?”

불평도 잠시, 대자누님의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맞다. 그때 대자누님이 내 어이없는 질문을 받고는 심히 울적한 표정을 짓더니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싹 뚝, 잘라 버린 것이다. 그때 바람에 몸을 실어 날아가는 머리카락들을 보며 얼마나 안타까워했는가. 그리하여 적지 않게 당황한 나는 슬픈 표정으로 말하는 대자누님이 남자란 사실을 알고는 내 실수를 묻으려 그때부터 무작정 ‘누님’이라 부르고 있는 거다. 물론 ‘언니’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여러모로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에 의거. 나름의 배려로 날 희생한거다.

적당한 반박의 말을 찾지 못한 나는 무작정 소리쳤다.

“윽, 아저씨 주제에!!”

“아저씨는 무슨 얼어 죽을 놈의 아저씨야?”

“흥,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아저씨지!!”

“뭐라고?”

“내말 틀렸어?”

이래 대자누님과 나는 서로 이마를 맞대고는 으르렁댔다. 배는 여전히 안전한 항공 중이었고, 선이는… 그때까지도 배안을 뛰어다니고 있었다.(…독한 것.)



제 3화 도착.


배가 출발한지도 어느덧 이틀이란 시간이 흘렀다. 아무리 오시리아 대륙이 하늘 섬이라고는 하나 해도 해도 너무 하지 않는가. 이렇게 먼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일찍이 내 인내심의 한계를 깨닫고 물러섰을 것이다. 2시간 전만해도 펄쩍 펄쩍 뛰어다니며 여러 곳을 메모하고, 만지고, 관찰하고, 또다시 무언 갈 미친 듯이 써내려가던 선이도 이젠 지쳐 맨 바닥에 널 부러진 것을 봐도 알 법도 하지 않는가. 길어도 반나절, 혹은 한나절 만에 도착할 거라 굳건히 믿고, 마음을 가다듬어 왔건만, 출항 직전 오시리아 대륙까지 삼일 남짓 걸린다고 소리치던 헬레나 님이 말씀이 계속이 떠올라, 괜시리 배신감이 드는 나였다. 그도 다행인 것은 대자누님이 식량을 와장창 싸온 덕에 배를 굶거나 하지 않았다는 정도?(사실상 대자누님이 동행한다는 소식을 안 뒤, 진작 싸온 식량을 이미 축 낸지 오래였다.) 소금에 배추 절이듯 지겨움에 몸을 담군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언제 도착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팔자 좋게 늘어져 있는 건 그다지 올바른 행위라 볼 순 없지만, 초초해 해봤자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니니, 마음 편하게 먹자는 거다.

지루함을 느꼈던 만큼 초침은 느리게 움직였고, 밤 또한 늦게 찾아왔다. 언제였던가. 하늘 위로 올라가면, 별이 더 가까워질까, 구름이 손에 잡힐까, 라고 생각하던 순수했던 시절이.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별은 가까워지지 않았고, 어둠만 짙어졌을 뿐이었다. 새삼 실망할 필요도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대자누님의 ‘이럴 때만 여자냐?’라는 불평 섞인 말투를 사그리 무시한 채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부러우면 누님도 여자 해~.

‘여자’라는 초특급권한으로 차지한 만큼 선실 안은 과히 나 혼자 들어갈 만한 넓이였다. 원룸 형태로 정확히 한 사람이 자기에 넉넉하지, 두 사람까지 눕기엔 아무래도 좁아 보였다. 곧 편하게 누운 나는 모포를 적당히 깔아 눕고는 꿈나라 직행 버스에 올랐다. 우하암, 쩝쩝.


간만에 꿈을 꾸었다.

꿈속엔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 나의 어머니셨다. 이리 온… 이리 온…, 계속 손짓하신다. 나는 피곤한데, 계속 오라신다. 하지만 오랜만에 뵈었거니와 예의 없게 ‘어머니가 이쪽으로 오셔요.’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난 납덩이같은 몸을 이끌고 어머니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몸이 이렇게 피로할 일이 있었던가? 어머니 앞에 다란 나는 말없이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도 침묵을 지키셨고, 누구하나 이러한 침묵을 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듯 했다. 마치 목소리를 빼앗긴 것처럼. 긴긴 적막이 지나가고, 어머니는 웃으셨다. 이상했다. 세월이 지난 흔적인지 어머니의 웃은 얼굴은 심히 흉측했다. 움푹 페인 눈 하며, 일그러진 표정은 고문을 받는 사람처럼 흉악했고, 금방이라도 안면이 깨질 것처럼 불완전했다. 갑자기 어머니는 몸을 흡사 간질에 걸린 사람처럼 몸을 심히 뒤틀며, 경련을 일으키더니 찰날 무언가 찢는 소리가 들렸다. 무엇일까. 좋지 않은 예감.

상창하게도 어머니의 등에 두개의 날개가 뻗어 나갔다. 피부 또한 점점 암갈색으로 변해갔다. …어머니, 뭐 잘못 드셨어요? 극한 상황에서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며 어머니의 변화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다리가 지면에 뿌리를 내린 듯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어느새 내 앞에 서있는 건 어머니가 아니라, 혼돈의 카오스가 어둠에 가둬버렸다는 크림슨 발록이 서있었다. 갑주로 가려진 육중한 몸과 두터운 팔. 드르렁거리는 길게 찢어진 입과 뾰족한 송곳니. 그는 나를 향해 비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난 흠칫 놀라 그제 서야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허나 크림슨 발록은 천근만근 무거워 보이는 우락부락한 팔을 움직여 나를 내리찍으려 하였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고, 그때까지도 내 머릿속엔 ‘어머니 뭐 잘못 드셨어요?’란 물음이 메아리 치고 있었다. 내 정수리에 그 팔이 가깝게 와 닿았을 때쯤, 크림슨 발록이 입을 열었다.

“린 님?”

이건 또 무슨 상황인지. 그는 두 팔로 내 어깨를 잡고는 뒤흔들었다. 머리가 울렸다.

“…린 님!”

존대였다. 확실히 존대였다. 크림슨 발록. 아니, 크림슨 발록으로 변한 어머니. 이젠 마음을 고쳐먹고 제 밑으로 들어오시려는 건가요? 하지만 어머니를 부하 삼을 생각은 없어! 난 무어라 호통쳐줄 심상으로 눈을 살짝 떴다. 순간 뜬 눈으로 초점이 흔들렸다. 이어 머리를 짚으며 미간을 찡그리자 드디어 뚜렷한 형체가 눈에 잡혔다. 맨 먼저 검은 색 로브 자락이 눈에 띄었다.

“아, 일어나셨군요.”

“…선이?”

그는 맞다 는 대답대신 싱긋 웃었다. 그런데 여긴 웬일 이지? 안 그래도 좁은데. 난 투덜대며 몸을 반쯤 일으키고는 선이에게 물었다.

“여긴 무슨 일이야?”

좁아 죽겠잖아, 얼른 나가라고. 란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선이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대자형님이 린 님을 모셔오라는 군요. 밖이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아요.”

대자형님이야, 사람을 좀 귀찮게 하는 구석이 있지만, 이런 늦은 밤엔 예의를 차려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부르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날 찾았다는 건 아마 진실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 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잽싸게 농갈색의 가죽 재킷을 챙겨 입고는 밖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가는 순간, 세상이 환해졌다, 이윽고 다시 어두워졌다. 놀랜 심정을 가다듬으며 그것이 번개임을 늦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데 아하, 그렇구나, 라며 납득하기엔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앞만 그래도 여긴 구름 위였다. 기상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을 뿐더러, 번개가 칠일도 없었다.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펴보고 있을 제,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원정이고 뭐고 간에 추락사로 세상을 하직한다 한들 믿어 의심치 않을 만큼 세었다. 나는 거센 바람에 대응하고자 눈을 치켜떴고, 대자누님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난화지검을 손에 든 체 주위를 경계하고 있는 대자누님과 나와 선이의 거리엔 조금 차이가 나 있었다.

“대자누님! 무슨 일이야?”

대자누님에게 물었으나, 대답은 없었다. 바람이 거센데다가 번개까지 쳐대니 듣기엔 아무래도 무리였다. 본능적으로 신발에 헤이스트 마법을 걸려던 손을 선이가 내 손을 붙들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차, 하며 끄덕였다. 이런 날씨에 헤이스트 마법을 걸었다간 정말 추락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난 선이는 부축하며 대자누님에게로 향해 다가갔다. 그새를 못 참은 장난기 많은 바람들이 앞으로 진전하지 못하도록 거세게 휘몰아 쳤지만, 굴하지 않고 걸었다.

왠지 바람이 깔깔대며 우릴 비웃는 것 같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바람 따위에게 무릎 꿇을 쏘냐. 마음속으로 크게 외치고는 코를 찡그리며 한발자국, 한발자국,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번에도 훼방꾼이 나타났으니. 어둠, 그것은 짙게 깔린 한 덩어리의 어둠이었다. 흡사 어둠 중심부엔 생장점이라도 있어 계속 세포 분열이라도 하는 듯 팽창해나갔다. 어느 순간 바람이 멈췄고, 어둠의 팽창이 멎었다. 그리고 무엇에 빨려 들어가 듯 다시 줄어들었으며, 티끌의 어둠이만이 남았을 적. 다시 그 속에서 어둠을 하나 낳았다. 육중한 몸과 길게 뻗은 한 쌍의 날개… 그리고 암갈색 피부. 난 떨리는 목소리로 혼잘 말 하듯 말했다.

“크림슨… 발록.”

콰르릉, 쾅!! 우르르, 쾅쾅쾅!!

번개에 합세한 천둥이 그의 등장을 환영이라도 하는 듯 번쩍 거렸다. 크림슨 발록은 기지개라도 피는 듯 몸을 힘껏 젖혔다가 바로하며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 나약한 인간이여.”

그는 비열하게 웃었고, 선이와 나는 그 자리에 멈칫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입안을 맴도는 질문을 무의식중에 내뱉었다.

“당신은 혹시, 제 어머니신가요?”

이것은 꿈이다. 이런 꿈을 꾸다니. 진짜로 착각할 뻔했잖아. 난 그렇게 단정 짓고는 하하, 웃으며 내 허벅지를 살짝… 그래, 아주 살짝 꼬집어 비틀었다. 아악!! 눈물이 찔끔 흘렀고, …이거, 아프잖아! 난 꼬집혀 벌겋게 달아오른 허벅지를 매만지며 크림슨 발록을 응시했다. 그는 다행이도 내 질문을 듣지 못한 듯 했다. 분명한건 지금 이것이 현실이며, 꿈이 아니라는 것. 당연 크림슨 발록으로 변한 우리 어머니가 아니다! 나 기절할래.

나는 머리카락을 잡아 댕기고, 표정을 일그러트리다가 마지막에 이마에 손을 짚으며 기절하는 시늉을 했고, 그 누구도 모르게 다가온 대자누님이 ‘역시 언덕 위의 하얀 집으로 보내야겠어.’란 결의 담긴 눈빛을 받아야만 했다.

실제로 본 크림슨 발록의 몸집은 무척 컸다. 장신이라 하기엔 너무 컸고, 거인이라 하기엔 조금 미흡해보였으나, 어쨌건, 우리의 몇 배 이상 크고, 강해보인 다는 건 확실했다.

“유우한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어찌하여, 오랜 언약을 잊고, 내 땅에 발을 들여 놓은 겐가!”

무슨 소리지? 저 말은 우리가 무슨 중요한 맹약을 잊어다는 말로 들리는데. 하지만 우린 크림슨 발록을 보는 건 처음이란 말이다!! 당연 그런 약속을 할 기회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크림슨 발록은 우리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식으로 그저 멀뚱히 서있자,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의를 모르는 자, 그 피 값으로 구원 받을 지어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당최 무슨 헛소릴 짓거리는 건진 모르겠으나, 지금 이 자리에서, 아무 이유 없는 죽음을 맞이하란 소리가 아니던가. 오! 이런, 17년, 짧은 인생. 내 평생 연애한번 못해보고 이대로 땅속에 묻히란 소리렸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언약’이라는 것은 예부터 성립되어왔고, 지금도 그것이 유효하단 얘기잖아. 그렇담, 헬레나 님이 이것을 전혀 몰랐다는 말은 말이 안 된다는 거다. **!! 또 속았어, 또, 그 악의 없는 환한 미소에 또 속았다고.

아무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야말로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 닿는 위압감에 졸도하지 않는 내 정신이 불만스러울 따름이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잘근 깨물었다. 크림슨 발록의 말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교만하게 두발로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혼약한 인간들이여! 답하라! 모든 것을 버린 채 죽을 텐가! 아님, 부질없는 발악을 하다 그 작은 머릿속이 고통으로 가득 채워 질 때까지 고통 받으며 죽어갈 텐가! 너희들의 끝을, 그 간약한 입으로 장식해라!”

어느 쪽으로나 죽는 건 같았다. 눈에서 눈물이 날 만큼 무서웠다. 아니, 그 외의 감정이 감히 들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찮게 눈이 마주친 대자누님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눈빛으로 말했다.

‘어떻게 할 거야?’

‘차라리 도망치자!’

‘어디로?’

‘선실. 잘만 도망치면 눈을 속일 수 있어!’

눈빛과 손짓, 그리고 고개 짓, 등의 제스처의 적절한 조화로 의견을 타협한 나와 대자누님은 뒤편에 ‘나 무지 심각함, 건들지 마시오.’ 란 팻말을 단 선이를 끌고 갈 요양으로 마음  속으로 셋을 외친 뒤 선실 안쪽으로 달리려 할 때였다. 선이는 표정을 풀며 우릴 향해 한번 빙긋 웃고는 크림슨 발록을 향해 당당히 걸어갔다. 크림슨 발록은 비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결정한 것인가. 나약한 인간이여.”

저게, 저게! 왜 말 마다 나약한, 나약한 거려? 네가 그렇게 쌔? 나랑 한판 붙어볼텨? 오냐, 오늘 너 죽고 나 죽어보자! 라고,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나는 살기를 담아 쏘아볼까!?… 했지만 역시 생각을 접고, 눈썹을 한번 꿈틀거리는 것으로 내 의사를 표현했다. 정말인지 소심한 발악이군. 하지만 생각해보라! 저 우락부락한 두 팔이 귀엽다며 날 한번씩, 한번씩 쓰다듬어 주는 날엔 염라대왕과 친근한 면담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드디어 크림슨 발록 앞에 도달한 선이는 나와 대자누님에게 했던 것처럼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네, 제가 가진 것을 모두 드리지요.”

선이의 충격적인 한마디에 잠시 굳은 나와 대자누님은 냉큼 현실세계로 돌아와 선이를 향해 소리쳤다.

“뭐, 뭐라고? 제정신이야?”

“이봐!! 세바스찬 군!!”

나와 대자누님은 선이의 충격적인 발언에 기겁하며 선이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선이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대수롭지 않다는 의사를 내보였다.

“크하하하하!! 그대는 저 두 마리의 ** 고양이 보단 말이 통하는 군.”

크림슨 발록은 호탕하게 웃었고, 선이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영광입니다.”

오연할 정도로 담담한건 선이 뿐이고, 나와 대자누님은 계속이 해명을 요구했다. 그러자 슬쩍 선이가 뒤를 돌아본다 싶더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모두 얻거나, 모두 잃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허나, 후자가 더 가능성 있다 봐야겠군요. 그런 확고한 미래가 있는데, 더 이상 무얼 망설이겠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선이는 다시금 크림슨 발록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깍듯이 허리를 굽어 절했다. 선이의 말을 곱씹었다. 선이는 절하고 일어서 크림슨 발록의 눈을 묵시하다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당신은 어둠에서 태어난 존재이거니와 카오스 님의 저주로 이곳을 떠날 수 없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지?”

선이는 오른손으로 턱을 괸 후, 왼손으로 그것을 바치며 말했다.

“돈과 재물을 좋아하십니까?”

크림슨 발록은 단도직입적인 그의 태도에 흥미가 생겼는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긍정을 표했고, 선이가 말을 이었다.

“저희는 어차피 죽을 목숨이며, 저희의 돈과 재물 또한 당신의 것이 될 것입니다.”

크림슨 발록은 이번에도 가볍게 고개를 끄떡였다.

“저희는 현재 오시리아 대륙을 원정하러 갑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임무지요.”

지금 어쩔 수 없었던 상황에 대해 신리하려는 것일까. 크림슨 발록 또한 어느 정도 그런 낌새를 눈치 챘는지 날카롭게 선 목소리로 말했다.

“말의 요지를 밝혀라.”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마냥 선이는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살려주세요.”

크림슨 발록은 침묵을 지키더니 호장하게 웃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그대야 말로 나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이었군. 살기위한 발악인가?”

“인간의 본능이죠.”

선이는 선뜻 비굴하나 결코 굴하지 않는 말투로 대답했다. 선아. 아니, 이제 선이라 불리었던 시체가 되겠구나. 너와의 추억은 잊지 않겠어.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네가 6개월 동안 공들여 만들다가 실패했던 실험. 실은 내가 이 왕성한 호기심을 주체 못하고, 물약 몇 방울 떨어트렸더니 그냥 폭발해 버린 거야. 그 덕에 구질구질했던 오두막집을 다시 지었으니, 너무 고마워하지나 말라고. 정 억울하면, 그 마수에서 살아남으렴. 오, 랑디르베르여. 어찌하여 당신은 당신의 어린자식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나는 혼자 온갖 망상을 해대며, 살아남을 길을 모색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어쨌든 저 무식하게 힘만 쌜, 크림슨 발록이 두 팔로 배를 내리찍는 순간 게임 오버, 가 될 테니까 말이다. 아아, 처량한 내 인생아.

크림슨 발록은 씩, 웃더니 위협적이게 팔을 뻗으며 선이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를 시험하려 들지 마라.”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타협을 권하는 바입니다.”

선이 역시 끄떡하지 않고 비꼼 있는 말투로 답했다. 과장되게 미간을 찌푸린 크림슨 발록이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날 능별 하겠다는 것이냐!”

하지만 선이는 크림슨 발록의 행동에 이젠 대놓고 신랄하게 웃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하등 미천한 인간 따위가 감히 크림슨 발록 님을 우롱하려 들 단요. 단순한 의견 교류입니다.”

“좋다. 진솔하게, 난 지금 그대에게 흥미가 있다.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라. 그대가 내 땅에 들어온 이상, 그댄, 내 배하에 있다는 것을.”

한마디로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선이는 간단히 고개를 주억거린 다음 제 위치로 돌아간 크림슨 발록을 주시했다. 그의 눈빛에는 언제든 살의의 뜻이 담겨져 있었다.

“그전,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을 보신 시기가 언제입니까.”

선이가 묻자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크림슨 발록이 말했다.

“난 어둠에서 태어났고, 어둠은 항상 상도한다. 그러기에, 나는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지 못한다. 아니, 시간조차 내겐 영향력이 행사하지 못한다고 봐야겠군.”

자뻑이 심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즈음, 선이가 수긍한 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자는 겨울을 준비하지요. 실상 저희는 약 400년가량 오시리아 대륙과 연을 끊고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만, 최근 대륙국 재정이 쇠해지면서 한 가지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들어보셨을 지도 모르겠으나, 오시리아 대륙은…….”

그 뒤 이어진 선이의 말을 간추려 보자면, 신들이 만든 보물섬이라는 주제로 시작되었다. 오래 전 업무에 지친 한 하급신이 인간계를 방문했다가 인간 여자와 서로 극심한 사랑에 빠져 버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영원한 영생을 얻은 신이었고, 그의 연인은 시간의 유해를 받는 인간이었다. 결코 공유할 수 없는 시간 속, 영원할 줄만 알았던 그들의 사랑은 여인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사랑하던 연인의 죽음을 슬퍼한 그는 끝끝내 연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그녀의 붉은 입술 닮은 매혹적인 루비광산을, 그녀의 투명하고 맑은 눈동자처럼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광산을, 그녀의 가늘고 부드러웠던 금빛머리카락처럼 아름다운 금 광산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 광산들은 하나의 큰 도시를 이룰 만큼 그 규모가 컸으며,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어, 찾기만 한다면 평생 돈방석에 앉을 거라 호언장담하였다. 마지막으로 이곳을 떠날 수 없는 크림슨 발록을 대신하여 얻은 보석 중 70%를 바치겠다고 약조했다. 선이의 말이 끝났을 무렵 주변엔 잔잔한 암묵적인 침묵이 흘렀다. 톡 까고, 우리의 목적은 돈이 아니거니와 오시리아 대륙에 처음가보는 선이의 말이 거짓이라고 확신이 갔지만, 선이의 말이 진실로 믿어도 될 만큼 조리 있고 왠지 모를 신뢰가 갔다. 끝으로 고개를 한번 까닥한 크림슨 발록이 할일 없이 인간계나 들락날락거리는 하급신들 이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라며 중얼거렸다.

“좋다. 그대들을 죽이는 건 조추를 위해 뒤로 미뤄두겠다. 그러나 그 약조가 성립되지 않았을 시엔 어떠한 방법으로든 그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땐 자신의 과계를 탓하라.”

으흠, 지금은 그것을 믿되, 어떤 술수를 써서라도, 그만한 자금을 모아오라는 것으로 상통해도 될 것이었다. 여하튼 그 말만을 남긴 체 유유히 사라진 크림을 발록을 바라보며 우리 셋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흐르는 식은땀을 훌훌 털어버리고 나니, 어둠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고, 우리가 제일 먼저 맡이 한건 세상을 붉은 물감으로 물들여버린 아름다운 태양의 일출이었다. 그간 크림슨 발록의 어둠에 갇혀 있을 때, 느끼지 못했던 시간의 경과였다. 그리고 이는 곧…….

“도착했어!! 오시리아 대륙이야. 오시리아 대륙에 도착했다고!”

모험의 시작을 의미한다.

대자누님의 말을 끝으로 우리는 점점 가까워만 지는 오시리아 대륙을 그렇게, 말없이 그저 바라만 보았다.



*          *          *




배는 어느새 정박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40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고이 잠들어, 세월의 흐름을 지키고 선 정박항이었다. 그 정박항을 지켜보며 나는 그 전 의문을 풀기위해 선이에게 물었다.

“그런데 선아. 방금 전 그 전설 진짜야?”

선이는 내말에 빙그레 웃었다. 그리곤 입술에 치도 안 바른 체 말하는 걸 보니, 어찌 좀, 불안한데?

“설마요.”

역시, 라고 중얼거릴 겨를 도 없이 선이에 말에 기겁하며 되물었다.

“에엑? 그럼 그 많은 돈을 어디서 구해!!”

돈이 궁해 원정을 하는 건 물론 아니지만, 그렇다고 빅토리아 대륙의 재정이 그리 빵빵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 원정의 끝이 즉, 우리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되리라! 선이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남의 일 말하듯 술술 말을 늘여놓았다. 아이코! 이 작자야!

“어떻게든 되겠죠, 뭐.”

선이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저런 미소로 사람(?)을 속일 수 있는 건지……. 역시나 선이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으아악!! 그나저나 난 아직 청춘이라고!!



제 4화 시작


뭉글뭉글.

몽실몽실.

폭신폭신.

둥실둥실.

이 모든 것이 구름을 일컫는 수식어들이다. 애초부터 정신상태가 글러먹은 낭만주의자들이야 나이도 먹을 대로 처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저 폭신한 구름 위를 한번쯤 거닐어 봤으면, 하는 부질없는 생각과 함께 기품 있는 왕자님과 자기를 엮는 유치찬란한 소설을 신명나게 늘여놓겠다만은 거듭 강조하듯 낭만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느낄 줄 모르는 이 몸께선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품고 자라날 여섯 살 나이에 ‘구름, 밟자마자 사망.’이란 논리를 키워왔었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 날아가는 새를 보며 ‘아니, 저 아름다운 날개 짓을 봐. 어디로 가는 걸까. 따뜻한 남쪽 나라겠지? 아아, 또 울음소리가 너무 예뻐.’라고 입에 발린 말을 하는 반면 ‘날아가면서 새똥이나 갈구지 마라, 이 허접한 것들아.’라고 쏘아주는 나였다. 당연 그런 낭만주의자들을 볼 때마다 비웃음만 먼저 나왔음은 물론이거니와 지금까지도 그 논리를 지켜왔고, 굳건하게 믿어왔건만. 이 순간 내 논리는 처참히 짓밟혔다. 지금 내가 밟고 서 있는 것이 바로…….

“구름이네.”

“구름이야.”

“구름이군요.”

…구름이었다. 이런 아이러니할 일이 있을 수 있나. 밟는 순간 안녕! 이란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지상과 뜨거운 접촉을 위해 전광석화로 달려가도 모자를 진대.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할 손짓은 고사하고, 턱이 빠지다 못해 땅으로 곤두박질 칠 상황이었다. 가끔 피부로 직접 접해오는 수증기의 미묘한 감촉에 흠칫거릴 뿐, 별다른 대처방안을 찾지 못한 체 멍청히 서있는 게 고작이었다.

겨우 제정신을 차리고 적응 될 레야 적응 될 수가 없는 구름을 밟으며―특히 뭉글한 느낌이 스칠 때마다 등골이 스산해졌다―좀더 걸어보자 어느 큰 마을에 발을 들여 놓았음을 어렴풋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마을이 바로 빅토리아 대륙과의 무역을 중재했으리라.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주위를 둘러본 나는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에 경계하기는커녕 쉽게 심취해버렸다.

객관적으로 따져봤을 때, 고작 이 마을 하나가 헤네시스 마을과 상준해보였다. 하지만 자연의 향이 짙게 베어 나오는 헤네시스와는 달리, 인위적으로 꾸며진 듯한 이 마을은 가히 미적으론 타의 추종을 불허해 보였다.

아름다운 꽃 속 가시를 품고 있는 장미덩굴은 마치 이 마을을 감싸 안 듯 마을 전체를 휘감았고, 간간이 손에 잡힐 듯 멀어지는 구름들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뿐 만인가. 하늘 섬에 걸맞도록 그저 먼 허공에 떠있는 대리석으로 지어진 돔형식의 건물들은 그야말로 신비로움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다만, 단하나 아쉬운 점이 있냐고 묻는 다면, 당당히 이렇게 대답하겠다. 생명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그래, 이곳이 아름답기는 하나 생명의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다. 풀죽은 페리온과 같은 삭막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래토록 혼자 버려져 길을 헤매 이는 어린 소녀처럼 가냘프고, 쓸쓸해보였다. 그저 평온한 바람만이 온기 잃은 집들 사이를 유유히 헤집고 다닐 뿐이었다. 우우우우웅―― 바람은 계속이 건물과 건물 사이를 오가며 흐느꼈다. 아무런 기척도, 아무런 생기도,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은 빈 공간에서 아이 찾는 어미마냥, 구슬피 울었다. 이 마을에 들어오기 전까지 몇 마디 농담을 주고받으며 미소 짓던 우리였지만, 이런 고요한 분위기 속 무언의 위압감에 그저 말없이 걸었다. 목적지도, 그렇다고 뚜렷한 목표도 없이 마을 곳곳을 배회하였다. 식은땀들은 이때다 싶어 삐질, 삐질 흘러내렸고, 나는 식은땀이 식으면서 으스스함을 느끼고, 불안감을 떨치고자 양 옆에서 조용히 걷고 있는 선이와 대자누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역시나 선이 또한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걷고 있었는데, 너무 긴장한 탓에 내 시선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풋풋한 동지애를 느끼며 선이의 턱 선을 주르륵 미끄럼 타는 식은땀들을 책망어린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벙긋 웃은 나는 이래 잠시나마 짧은 동지애를 만끽하고는 다음 코너인 대자누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분위기에 항상 헤실 거리던 얼굴은 어떻게 굳어졌을 까나~. 난 속으로 대자누님이 울상 짓는 표정을 상상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훗날 빅토리아 대륙에 돌아갔을 때, ‘이봐~ 글쎄, 대자가 말이야. 오시리아 대륙에 발을 들여 놓자마다 벌벌 떨고 있지 뭐야. 역시 그가 여태껏 보여준 건 모두 허세였어! 속은 거라니까. 나 말이야? 나는 사명감에 불타올라 두려움도 잊고 있었지! 냐하하하!! 알고 보니 대자도, 영락없는 겁쟁이였다니까~. 그때 그 표정을 직접 봤어야 돼. 쿡쿡.’이라는 쪼끔. 그래, 아주 쪼오금~ 과장된 주제로 시작될 설교를 생각하며 실소를 흘렸다. 난 부드러운 미소 속에 나의 사악성을 숨기며 대자누님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난 암울의 구렁텅이에 퐁당, 입선하고야 말았다.

어느 때보다 빛나 보이는 환한 얼굴에 환희에 달아오른 저 미소! 금방이라도 룰루랄라 콧노래를 흥얼거릴 듯한 저 미소! 무엇보다 삐뚜름하게 올라간 입꼬리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저 부담스런 하트들!! 도대체 뭐가 그리 좋은 건지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는 게 아예, 광채를 띄고 있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볼만한 게 못됐다. 물론 허상에 빠져 사는 철 못 든 소녀들이야 꺅꺅! 소리를 질러대며 귀를 괴롭히겠지만, 그렇게 귀찮게 굴어야할 소녀들은 여기에 없으니 일단은 무시하도록 하자. 덕분에 긴장이 스르르 풀어짐을 느끼며 한숨덩어리를 내 뱉은 나는 양손을 깍지 껴 뒤로 넘겼다. 그런데 언제까지 걸을 생각인거야. 어느새 마을 중심부까지 온 듯싶었다. 난 저려오는 다리에 뽀로통해져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선이는 내 의도를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찌푸려진 이맛살을 보며 의아한 눈초리로 물었다.

“왜 그러세요, 린 님?”

선이의 정중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짜증부터 났다. 난 불만으로 양 볼을 꽉꽉 채어 넣으며 불만을 토로했다.

“언제까지 걸을 셈이야? 다리 아파 죽겠다고.”

그때서야 그 둘은 아차, 했는지 어색하게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설마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우리가 얼마나 걸었는지 알아? 벌써 점심때가 훨씬 지났단 말이야! 역시 넌 숨겨진 초인이었어.”

선이는 내 가시 돋친 말에 움찔하며 대자누님을 바라보았고, 대자누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동조한다는 의미! 난 구겼던 얼굴을 펴며, 어깨에 메고 있던 짐을 내려놓았다…가 아니라 내려놓으려 했다.

쓩쓩쓩―탕탕탕!!

어딘가에서 날아온 화살 세 개가 정확히 내 왼발 옆에 연이어 꽂혔다. 몸이 경직됨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습이었다. 실전을 토대로 쌓아진 일종의 ‘감’이었지만, 결코 다수는 아니었다. 우리 쪽은 고작해야 세 명이었고, 다수라면 굳이 이런 시시콜콜한 기습보다는 직접 뛰어들어 싸우는 것이 더욱 승산이 있었다. 어디지? 나는 화살이 날아온 기점을 중심적으로 쏘아보았고, 내 의문에 답하듯 미성의 앙칼진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누구냐!!”

하지만 상대를 찾는 것에만 급급할 뿐, 누구하나 그 물음에 답하는 이는 없었고, 원하던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공기를 가르는 극예한 목소리가 다시금 울렸다.

“말해!!”

쓩쓩―탕탕!!

그 목소리와 함께 두개의 화살이 덤으로 날아왔다. 한 화살은 선이의 오른쪽 겨드랑이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빗겨갔고, 다른 하나의 화살은 대자누님을 향해 날아갔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자누님은 피하지 않았다. 그 덕에 화살이 스친 오른쪽 뺨이 깔끔하게 일직선으로 찢어져 붉은 선혈이 배어나왔다. 본래, 화살의 주 목적은 단순한 위협 같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전신이 쩌릿해질 지경이었다. 대자누님은 아픔을 느끼는 건지 느끼지 않는 건지, 너무도 태연한 얼굴로 화살이 날아온 지점을 정확히 응시했다. 날카로우나 따뜻함을 품은 눈빛과 평소와 다른 의미의 부드러운 미소를 띠면서.

“나와, 희노.”

대자누님은 그 여인을 아는지 ‘희노’라는 이름까지 불러가며 그녈 향해 웃었다. 그러자 ‘어머나! 당신은!’이란 안 봐도 뻔할 그런 스토리가 아닌, 전혀 다른 행동이 나왔다. 쯔윽.

활시위를 더욱 쌔게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물론, 그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니나, 나 또한 헬레나 님의 강요로 활을 잡아 본 전적이 있기에, 활시위의 미세한 느낌을 가까스로 감지한 것이었다. 대자누님은 여인의 행동에, 오, 이런, 하며 짧은 실소를 흘렸다.

“누구냐고 물었다!!”

쓕!

여인은 화살하나를 더 쏘아붙이며 더욱 앙칼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거, 은근히 막 가 파인데? 화살도 꽤나 비싸 보이는데 말이다. 돈이 아주 썩어 나나보군.

둥의 엉뚱한 생각도 섭섭잖게 하며 화살의 경로를 이어보니, 화살은 방금 전 스친 뺨, 바로 아랫부분을 스쳐지나갔고, 이번에도 역시 찢어졌는지 전에 찢긴 상처와 평행을 이루며 선혈을 흘렸다. 대자누님은 이번엔 좀 아팠는지 오른쪽 눈을 살짝 찡그렸다. 아무렴, 작은 **가 더 맵다고들 하지 않는가. 오히려 손바닥으로 등을 때리는 것보다 손톱으로 작은 살점을 꼬집을 때가 더 아픈 법이다. 선이는 대자누님의 행동에 치유마법으로 상처를 치료해주려 했지만 한 발자국 떼기도 전에 대자누님이 한 손을 척, 하니 내보이며 더 이상 다가오지 말란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곤 그것만으로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우리들을 조금 더 뒤쪽으로 물러나게 했다. 하여간 저 놈의 고집이란!

“나라니까.”

기운 없이 답하는 대자누님의 어조가 약간 침울해 보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상대는 대자누님의 존재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듯싶었다.

“나가 누군데!”

대자누님은 양손을 각각 허리에 얹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슬쩍 뒤를 돌아본 그가 우리의 눈치를 살피는 것 마냥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정말인지 듣는 내가 다 힘이 바질 어투였다.

“에리언 리칸 오시리아.”

탕! 타아아앙.

대자누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활이 대지의 품속으로 달려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음음, 헬레나 님이 저 모습을 보셨다면 길길이 날뛰시며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을 거다.

[궁수의 활은 검사의 검과도 같습니다. 그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다는 것은 항상 상기하도록 하세요. 검사가 검을 떨어트리는 즉시, 운명을 다 하듯, 활 또한 손에서 놓아지는 순간 제 명은 다 한 것입니다.]

이봐, 당신! 규칙 위반이야. 난 오랜만에 봄날의 아지랑이 올라오듯 새록새록 피어나는 궁수 수업에 절로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힘 조절을 못해서 활시위를 끊어 먹은 게 몇 번이었던가. 그 외에도 화살로 땅을 파거나, 창던지기를 하며 놀았던 기억도 떠올랐다. 물론 그에 대한 대가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지만. 무언가 미심적인 것이 있다면 선이가 굳어버린 정도? 왜 그러니, 선아. 너도 듀스피앙 엔셜 씨와의 참담했던 수업이 떠오른 거니? 쯧쯧, 얼마나 끔찍했으면 벌벌 떨기가지 할까. 난 동정어린 눈길로 선이를 바라보았고, 선이의 비명소리가 들린 것은 내가 선이를 향해 발을 내딛은 시간과 일치했다.

“에리언 리칸 오시리아!!”

선이는 손가락으로 대자누님을 가리키며 크게 소리쳤다. 물론 그 무식하게 길기만 한 이름이 걸리기는 하지만, ‘대자’라는 이름이 진짜라고는 한번도 생각해 본적도 없었고…―그 최악의 작명센스라고는!―또 대자누님이 어렴 풋 이곳 사람일거라 느끼고는 있었다. 으흠, 그런데 여긴 아무 이름 끝마다 대륙이름을 붙이나. 그럼 나도 나중에 내 소개를 해야 할 때 ‘린 에리노 오시리아’라고 소개해야겠군. 나름 예쁘네. 오케이, 마음에 들었어. …가 아니잖아!!!

“억!!! 에리언 리칸 오시리아!!!”

이, 이럴 수가!! 설마, 아니겠지? 에잉~ 대자누님, 뻥도 잘 치셔! 하하하…….

…그런데 왜 이렇게 슬프지? 아아, 이건 불쌍한 오시리아 대륙 시민들을 위한 묵념인가봐. 선이는 입만 뻥끗한 채 대자누님을 주시했고, 나는 속으로 하하 웃으며, 허망한 눈초리로 대자누님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사락― 하는 사뿐한 착지음과 함께 ‘희노’라는 인물로 추정되는 여인이 드디어 모습이 드러냈다.

나이는 나보다 한두 살 위일까? 그녀는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의 소유자였는데, 웨이브 져 산만해 보일 것만 같은 그녀의 머리는 차분한 앞머리와 그의 양끝 쪽부터 길게 내려트린 붉은 머리카락을 이어 하나로 묶어 내려서인지 전혀 그런 감 없이 단정해 보였다. 특히나 삐져나와 귓가에서 말려있는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다―남자로 치면 구레나룻이랄까―. 그뿐만 인가! 뽀얗고 흰 피부에 크고 동그란 그녀의 붉은 눈망울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였고, 오뚝한 코와 콱 깨물어 주고 싶은 붉은 입술은 그녀의 외모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건 당연했다. 또 나풀대는 흰색에 가까운 분홍빛 옷은 민소매 스타일의 치맛자락이 무릎 바로 위까지 오는 원피스였는데, 옷을 고정하기 위해서 쓴 허리선을 감싼 같은 옷감의 천 끝자락이 펄럭여 신비로우면서도 기품 있는 분위기를 선사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희고 보드라운 손에는 방금 떨어트렸던 것으로 추정되는 불꽃같이 빨간 활이 쥐어져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에라도 대자누님 팬 무리에 버금가는 청소년들의 집단을 형성하는 건 별 무리도 되지 않을 듯싶은 것이… 리나 언니도 거뜬히 물리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쪼록 외형미 때문인지, 결코 가볍지 않은 분위기에 왠지 자존심 있어 보이는 그녀는 우리 앞에 당돌하자마자 뜻밖에 대자누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오르비스 총 경비대장, 희노 세레니아. 오시리아 대륙의 황태자이신 에리언 리칸 오리시아 님을 아뢰옵니다. 그간 평온하셨는지요.”

“나 참. 그런 닭살 돋는 사무적 멘트는 집어치우라고. 지금 닭털 날리는 거 안보여?”

거기다 배짱 좋게 응수하는 대자누님이란. 끄떡끄떡. 그나저나 여기 마을명이 ‘오르비스’인 모양이네. 또 저 사람 은근히 높은 직책을 떠안았나 보군. …그리고……. ‘황.태.자.’라니!!!!!!

크아아악!! 이럴 순 없는 거야. 세상이 날 저버려도 한참 저버렸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전에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잖아? 조목조목 따져볼까? 아니, 그전에 날 밤이 셀 것 같아. 어이! 거기, 예쁜 누님!! 방금 한 말엔 아무래도 어폐가 있는 것 같은데. 멱살이라도 쥐고 짤짤짤 흔들어 줄까? 제발, 정정해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이런, 흑흑. 원래 그, 황.태.자. 라는 족속들은 다 저런 거야? 노을빛을 받으며 백마를 타고 다가와 따뜻한 말을 건네줄, 왕자님은!? 곤경에 쳐했을 때 ‘레이디!! 다친 덴 없소?’라고 걱정해줄, 왕자님은!? 이건 말도 안돼. 인정 못한다고!! 이것이 소설과 현실의 괴리란 말인가!!

…지금까지 머릿속에 그려왔던 ‘황.태.자’의 이미지가 우람한 몬스터가 쿵쾅거리며 다가오다가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져 뇌진탕으로 죽는 것보다 더 허무하게 챙그랑! 깨지는 순간이었다.



*          *          *



절대 왕정 시대의 오시리아 대륙의 대륙국, 오시리아는 여러 종족과 자잘한 부족들이 모여 사는 나라였다. 문화도 각양각색이었고, 풍습도, 사상도 달랐지만 집단과 집단, 혹은 마을과 마을 사이의 상호관계는 원활하게 이루어졌고, 물자나 자원도 많아 표면적으로 봤을 땐 부족한 것 하나 없는 풍요로운 나라였다. 그러나 몇 년 세 쇄약하진 왕권으로 각 지방 귀족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고,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정도는 더 심했다. 특히 황성과 중앙귀족들이 밀집되어 있는 루더스의 호수엔 날이면 날마다 사치나 향락에 젖은 귀족들만의 무도회가 열렸다. 마법사를 초빙하여 불꽃놀이를 연다거나, 악단을 불러 연주회를 열어 춤을 춘다거나, 십분 버려지기 십상인 음식들은 썩어 넘치도록 많았으며 큰 판에서 벌어지는 도박들까지. 황성으로 올려질 세금은 중간에서 빼 돌린 지 오래였고, 백성들을 물기를 잔뜩 머금은 ** 짜듯 가렴주구 한 돈으로 연, 그야말로 돈의 축제였다. 이런 악순환이 지속되면서 낳은 결과물이라고는 점점 피폐해져가는 백성들의 민심과 가난함이었다. 늙은 황제는 제 몸 하나 간수하기에도 벅찼고, 이 때를 위해 자리를 지켜야할 황태자는 홀연히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아니, 암묵적으로 그들 사이에선 죽은 거나 마찬가지이니 다른 황자가 없는 마당에 황가의 핏줄이 끊기는 건 시간 문제였다. 물론 황제파가 그들을 견제하긴 했지만 그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그것도 몇을 제하고는 별 볼일 없는 귀족들이었다. 또한 지방으로 쫓겨나가다 시피 내려간 뒤였기에, 이젠 그들을 막을 세력은 없었다.

하지만 이미 내정이 썩어 들어가 타락의 길을 걷고 있는 수도, 루더스에서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영지가 한 곳 있었다. ‘카디발디브’ 다름 아닌 티에르 백작의 영지였다. 황제의 오른팔로 백성들 사이에서 명성이 드높은 그는 30대 중반의 중년으로 빠르면 10년 안에 소드 마스터가 될 거란 소문이 나돌 정도로 검술 하나엔 일가견이 있는, 미래가 요망한 자였다. 뿐만 아니라 학식이나 전략가의 면모도 뛰어나 다재다능한 사람이기도 했다. 백성들에게 인지도도 선망도 높을뿐더러 그의 재력이나 사병 또한 막강하니 제 아무리 황제파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찌르는 것은 가문의 멸(滅)을 의미했다. 제 먹을 것 하나 아껴서라도 자신의 영주민을 감싸 안을 만큼, 그는 영주민들을 매우 아꼈다. 한달에 한번 영주순례를 돌만큼.


티에르 백작은 화려하기 보단 실용성을 추구한 자신의 저택에서 늦은 시각까지 서류를 결제하다 잠이 들었고, 곧 깨었다. 천천히 손을 더듬자 그의 손엔 자신의 일부분인 검이 쥐어졌다. 기척 없이 다가온 인영은 그와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드레스 끝자락을 살짝 들어올리며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놀랍게도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백작 나으리.”

낯익은 목소리에 긴장을 풀기는커녕 검을 더 힘껏 쥔 티에르 백작은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킨 상태로 여인을 노려보았다. 첫말을 뗀 그의 목소리는 깊게 잠겨있었다.

“무슨 일이냐.”

“딱딱하시기는. 별것 아닙니다. 다만 때가 되었을 뿐.”

“……!”

그는 흠칫 몸을 떨며, 여인의 말을 곱씹었다. 현 상황에서 저 말은 단 한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벌써 그가 돌아온 것인가!

“그렇습니다. 어리 숙한 조무랭이들을 몇 끌고 왔더군요. 어떻게 할까요.”

눈을 번뜩이는 여인의 모습은 흡사 길들여지지 않은 한 마리의 맹수처럼 사나웠다.

분명 의견을 묻는 것이 아니라 ‘옳다’는 식으로 나오라 강요하는 어조였지만 백작은 오히려 익숙한 듯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단, 침묵했을 뿐이다.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있다면 한 조각 남아있는 한때가진 주군을 향한 순간의 충성심. 오직 그뿐.

“실행에 옮겨라.”

자신의 귀를 통해 다시금 울리는 목소리는 자기 자신조차 낯설 정도로 소름끼쳤다. 낮은 목소리는 고요히 어두운 방 안을 울렸다. 그것에 흔치 않은 초록빛 머리카락의 여인은 만족스런 대답을 얻은 듯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과장적인 손동작을 곁들어 짧게 경례한 여인은 종종 걸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살짝 그의 눈썹이 꿈틀거리고, 티에르 백작은 여인을 불렀다.

“당최 속내를 알 수 없는 여편네로군. 도대체 나를 돕는 궁극적 목적이 무엇이냐. 지금 당장은 너희에게 돌아갈 이익은 없을 텐데?”

자신을 떠보는 말임을 눈치 챈 여인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어리석은 인간. 정면을 직시한 여인은 달빛을 받아 든 눈으로 티에르 백작을 보며 노골적인 신랄한 웃음을 날렸다.

“이제 와서 두렵다 말씀하실 심상입니까. 걱정 마십시오. 일종의 투자입니다. 훗날 당신이 왕이 되었을 때를 대비한.”

티에르 백작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를 이용하겠다는 건가.”

“맞습니다. 이제 곧 몬스터의 세상은 옵니다. 그들은 음지에서 너무 긴 유해기간을 거쳤습니다. 이젠 햇빛이 있는 양지로 나설 때죠. 그때 한때나마 동업자였던 당신이 황제라면, 한결 수월하겠지요.”

희열을 띤 여인의 입가엔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그때가 되면 인간은 우리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몬스터의, 몬스터에 의한, 몬스터를 위한 세계가 펼쳐질 것임이었다! 때는 얼마 남지 않았다. 나타나는 걸림돌은 뛰어넘으면 그만이었다. 그때까지 조용히…, 기다릴 뿐.



*          *          *



“아, 글쎄, 나도 피해자라니까!”

“조용히 하세요!! 이게 다 누구의 부주의 때문인데 그러세요?”

“윽!! 희노가 달라졌어. 예전엔 내말이라면 전적으로 따라줬는데. 아아! 무정한 세월아!”

“말 돌리지 마세요!”

“쳇.”

…그러니까, 저 말싸움 아닌 말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지금까지의 얘기를 간추려 보자면, 즉 이랬다.

유난히 화창했던 어느 날. 구름한점 없이 새파란 창공의 하늘과 탁 트인 공간 안에 자유로위 하늘을 누비는 참새들. 한 뺨 자라난 꽃들이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다. 지극히 평화로웠다. 그런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 당장에 샌드위치라도 싸서 황성을 누비고 다녀야 할 자신일진대 어찌하여 이런 새장에 갇혀 하늘을 우러러보는 카나리아 같이 방 안에 틀어박혀 있어야 하는가. 게다가 오늘은 다름 아닌 ‘예절과 법도’시간이 아니었던가!! 어느 샌가 푸드덕 날아와 이런 자신의 처지를 비웃는 마냥 그 좁쌀 같은 부리로 자신의 창가를 콕콕 찍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참새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가슴 속 깊이 참을 인, 참을 인, 을 새기던 그의 인내심 케이지는 한도를 초과한 뒤였다.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자고로 인생은 즐기며 사는 법. 이런 곳에서 썩어 날 순 없다고 생각한 대자누님은 잠시 휴식시간을 자청하며 ‘될 대로 되라 지!’란 막무가내 심보로 시종들의 눈을 피해 ‘황태자의 반란! 공부를 철퇴하라!’란 명목아래 대단한 탈출을 감행했다고 한다. 처음엔 지난 전적들을 돌이켜 생각하며, 별것 아니라 생각하던 사람들도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질 않자, 또 야? 에 그치던 생각이 점차 좋지 못한 생각으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자칫 잘못하여 황제의 귀에 들어가는 날에는 그의 교육담당이었던 ‘메스테르 자작’이 경벌을 받을 건 당연한 전개였고,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질 않는 무심한 황태자를 찾는 시종들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뒤 지진 않을 것 이니라! 신분을 초월해 같은 이념아래 똘똘 뭉친 그들은 필사적으로 대자누님을 찾기 시작했다.

황성이 뒤집힌 지도 모르고 곧 앞뜰에 도착한 대자누님은 마침 눈에 띈 버드나무 위로 올라갔고, 그날따라 유족 밀려오는 잠에 때 아닌 낮잠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러다 문득 거세지는 바람에 눈을 뜬 대자누님은 자신을 애타게 찾고 있는 시종들과 시녀, 그리고 경박하게 뛰어다니는 메스테르 자작을 보며 자신의 목적도 잊은 채 너무도 단순히 ‘간식’을 떠올렸고, 입가에 얄망스런 미소를 띠우며 슬슬 애간장 태우는 그들에게 구원의 빛을 내려줄 참이었다. 그러나 불시에 자신의 주위에 순간의 빛과 함께 마방진과 흡사한 텔레포트 마법진이 나타나면서 광야의 빛과 함께 강제 텔레포트를 당했다했다.

음, 그래서 빅토리아 대륙까지 오게 되었고, 적절한 타이밍에 땡땡이치던 날 기절시킨 게로군. 아차, ‘대자’란 이름은 예전부터 이런 유희를 겪게 될지도 모른단 생각에 아주 오래전부터 지어두었던 이름이라나? 상황이 뒤받쳐 준다면야 그의 선경지명에 감탄하겠지만, 그의 신분과 상황으로 유추해봤을 때 누구든 고개를 내저을 것이니 패스다. 대자누님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우릴 보고, ‘냐하하핫!! 내 작명센스 멋지지 않냐? 신이 단 한 가지 실수를 했다면 이 몸께 너무너무 많은 능력을 부여했단 거야!’라는 유치 뽕짝한 말을 절대적으로 빼놓지 않는 충실함을 보였고, 당연, 무시되었다.

‘대자누님 난 정말 당신을 존경해.’

차마 후환이 두려워 속으로 삭힌 나는 대자누님을 향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속으로 킥킥대던 나는 대자누님과 여인을 번갈아 쳐다보았고, 대자누님은 그녀의 질책어린 시선에서 헤어 나올 방법을 구사하는 듯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다가 마침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을 번뜩였다. 어째, 영 불안한데?

“희노~? 안 본새 많이 대범해졌구나? 나한텐 활을 쏘질 않나, 대놓고 말대꾸를 하질 않나, 내 친우들을 싸악! 무시하질 않나. 지금 능별 이냐?”

대자누님? 당신 말은 눈에 띄게 모순적이야. 화살은 당신이 안 피한 거고, 선이가 치유마법으로 치료해 줬잖소? 또 침착함을 유지하던 그녀도 당신이 너무 어이없게 사라져 걱정하는 뜻에서 그런 거고, 우릴 무시한건……. 이런, 적당한 이유가 없잖아! 책망어린 시선으로 대자누님을 곁눈질 하던 나는 순간 당황했고, 급조하느라 어색한 문장을 술술 풀어 말한 대자누님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입고리를 살포시 올리며 여인을 내려보았다. 그녀는 대자누님의 말에 당황한 듯 식은땀을 주르륵 흘리며 말했다.

“서, 설마 그럴 리가 있습니까.”

하지만 더욱이 짙어지는 대자누님의 미소에 낑낑, 대던 여인은 서둘러 맞은편에 앉아있는 우리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거 참 희한한 일이란 말이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칼을 들이밀고 싸우던 상대가 이젠 자기소개를 한다, 라.

“오르비스의 총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희노 세레니아’라고 합니다. 나이에 관여치 마시고 편히 ‘희노’라고 불러 주십시오.”

먼저 선이가 씨익 웃으며 같이 고개를 숙였다.

“‘선 세바스찬’ 입니다.”

이쯤 되면 내 차례군. 나는 숙연하게 고개를 숙였…, 아니, 숙이려 했다.

“전원 소개 끝.”

빠드득.

능청스럽게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말하는 대자누님을 보자니 저절로 이가 갈렸다. 훗날의 복수를 기약하며 대자누님을 향해 살기어린 미소를 쏘아주고는 희노 양을 향해 말했다.

“에, 전 ‘린 에리노’라고 해요. 톡 까고, 친하게 지내자구요.”

희노 양은 내 소개까지 무사히 마치자 빙그레 웃었다. **, 예쁘잖아.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친 것 같군요.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제 딴에선 에리언 님의 안위를 위해 억지스런 고집을 펴 동행을 요청하긴 했습니다만…….”

여차저차 하다보니 잠시 잊고 있던 희노 양의 동행 얘기가 두각을 드러내자 나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인원은 많을수록 좋은 거잖아요? 솔직히 백 번 양보해서 저 멍청스런 대자누님을 어떻게 간수할지 고민했었는데, 다행이네요.”

후에 이어질, 아무래도 당신은 대자누님 간수 법을 너무너무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니까! 라는 문장을 목구멍 뒤로 꾸역꾸역 넘기며 내말에 혹시나, 황태자를 보고 멍청하다니요! 간수가 힘들다니요! 이런, 무례한!! 이라며 단숨에 칼부림 칠 것 같았던 희노 양이 의외의 동조의 빛을 띠자 난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꾹 참았다. 대자누님도 어이가 없었는지 울먹이는 표정으로 희노 양을 바라보았다. 그런데도 태연한 척 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희노!! 너무해!”

잇따르는 절규하는 대자누님의 목소리가 날 기분 좋게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문득 뇌리를 스치는 의문에 고심의 고심을 더한 끝에 나는 힘겹게 희노 양에게 말을 붙였다. 희노 양에게 매달리며 울먹이는 대자누님의 투정을 떼어놓으려는 것도 적잖아 있었지만.

“그런데 저희도 대자누님에게 말을 높여야 하는 겁니까?”

내 의미심장한 눈빛에 희노 양의 어깨가 떨리며 움츠러들었다. 이것은 나에게 꽤나 중요한 사실이기도 했다. 생각해봐라. 나보고 저 덜떨어진 인간한테 존댓말을 하라고? 하늘이 두 쪽 나도 그렇게는 못한다! 황태자면 뭐 어떠랴? 아니, 그보다 왜? 내가 내 맘대로 하겠다는데. 지들이 멱이라도 딸 겨, 어쩔 겨. 진실로 내가 그 보다 못한 것도 없고 모두 다 동등한 선에 선 인간이다. 물론 오래된 동화책으로만 접해오던 왕정이었다. 그에 대한 지식이 희박하다고는 하나, 실상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왕족이니, 귀족이니 확실히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여태껏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라왔으나 한때 그런류의 책들을 많이 감상해 본 나로써 정나미 뚝뚝 떨어지는 왕정에 거부감이 들뿐더러 혐오감도 들었던 때도 더러 있었다. 빅토리아 대륙의 경우 헬레나 님을 비롯한 다른 현자들 또한 개방적인 사회를 추구해왔으며, 보다 나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 힘써왔다. 원로원이 있다고는 하나 빅토리아국의 원수―이것도 상징적 의미가 크지만―, 혹은 마을의 시장 벌로 생각하면 오히려 쉬웠다. 여론도 자유로웠으며, 시민들을 우선적으로 내세우는 곳이었다. 가끔가다 나오는 미친놈들이나 법률을 어기고 판 죄를 받을 뿐, 바람 따라 살랑 이는 갈대들처럼 곧고 부드러운 정치였다.

반면 이곳은 내가 듣고 자란 그런 정치적 기본 상식이 통하질 않는 곳이었다. 왕족과 귀족들이 백성들을 구속하며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의지를 꺾거나 반문하려 들면 ‘반란’이란 그럴싸한 겉포장을 싸고 말도 안돼는 말을 껴 맞춰 곧바로 응징에 들어간다고 한다. 제 배체우기 바쁜 그들이 백성들의 생활수준을 고려하기엔 역시 무리였고, 갈수록 사태는 악화되는 형편이었다. 어릴 적 호기심으로 봤던 바, 이들 평민들의 무지함으로 인해 태어날 때부터 귀족, 더 나아가 왕족을 향한 ‘절대복종’의 정신을 몸에 배고 산다고 한다. 아니, 이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드려 문제랄까. 막말로 그다지 잘난 것도 없으면서, 제 멋에 거들먹거리는 그들이 좋게 만은 보이지 않는 건 내 성격상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게다가 더 웃긴 것은 그들이 신의 자식들이라도 된 듯 마냥 신성하게 떠받들어져야 하며, 보통 평민들과 필히 차별화 돼야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 여겨지는 것이란다. 웃길. 우리 아름다우시고 선량하신 랑디르베르 님은 결코 그렇지 않아! 그런 썩어빠진 개념은 쓰레기통으로 직행해야 옳다. 그러니 나는 못한다. 나는 가량하고 선량한 민주주의의 정기를 받은 주권을 지닌 시민. 그들을 보며 고개를 숙인다고 나한테 돈이라도 날아오나? 아님, 밥이라도 한 끼 사주나. 또 내가 이곳으로 왔다 해도, 내 기본적 성향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대자누님에게 존댓말을 쓰라고? 순순히 인정할 내가 아니지!

내가 심각하게 묻자 대자누님이 폭소하며 말했다.

“여! 린 에리노. 넌 내가 하라고 하면 넙죽 ‘예이!’하면서 할 거냐?”

그의 빈정거림에 주먹을 불끈 쥔 나는 한 글자씩 끊어 읽으며 말했다.

“절! 대! 적! 으! 로!”

“키킥, 그럼 편히 불러라. 나도 그쪽이 더 편하다고. 희노, 너도 황태자니, 에리언 님이니 뭐니 집어치우고, ‘대자’라고 불러. 물론 말도 놓고 말이야. 어떠냐? 이쯤이면 ‘평민에게도 후한 고귀한 황태자 에리언 리칸 오시리아’라는 소문이 돌 것 같은 포스가 느껴지지 않냐?”

‘이보게 대자. 역시 당신은 몽상가야!’

그다움에 피식 웃은 나는 대자누님의 충격발언에 충격 먹었을 희노 양을 바라보았다. 듣기론 ‘기사도’정신이라 하여 자신이 인정한 주군을 평생토록 섬기며 따른다고 들었다. 과연 그녀는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 나갈 것인가!

“하, 하지만, 그건…….”

“괜찮다니까 그러네. 너 내가 언제 빈말하는 것 봤어?”

“끄응, 진심이십니까?”

끄덕.

대자누님은 능청스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희노 양은 그것으론 답이 부족하다 느꼈는지 다시 한번 되물었다.

“저, 정말이시지요?”

끄덕.

“저…….”

“희노~ 설마 내입에서 명령이란 말이 나오기까지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야말로 직격탄. 한방 먹은 표정의 희노 양은 대자누님의 고집을 꺾을 수 없으리라 확연한 답을 얻었는지 알았다고 시인했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난 그녀가 대자누님에게 박차를 가한 건 그 다음이었다.

“대자누님, 가자.”

얼핏 느껴지는 강력한 어색함에 분위기가 스산해졌지만, 대자누님의 표정은 돈 주고도 못 볼 만큼 가관이었다. 희노 양의 ‘대자누님’이란 호칭에 반쯤 혼이 빠져나간 것이다. 자기 딴에선 ‘오빠~’라는 말이라도 기대했나**? 크큭. 아무래도 희노 양은 자신보다 2살이나 어린 내가 ‘대자누님~’이라 부르는 것을 보며 ‘대자누님이라 부르면 되는 것이로군.’이란 기특한 추리를 한 듯싶다. 대자누님은 한참 만에 도리도리 고개를 휘젓다가 어느 정도 면역력이 생겼다는 듯 마냥 다시금 웃으며(속으론 울고 있으리라!) 일어났다. 대자누님이 자리에서 일어남에 따라 희노 양이 선이와 나를 향해 상냥하게 말했다.

“일어나셔요. 제가 은신처로 안내하지요.”

“풉, 푸읍, 푸하하하!!!”

 고장난명이란 바로 이것을 일컫는 말이었을까.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이게 딱 그 짝이었다. 대자누님이란 호칭을 쓸 땐 그저 고소함이 짙게 묻어나는 눈빛으로 쏘아주는 것만으로 그쳤었건만, 그 한 손에 이번 한 손이 더 추가되니, 도저히 웃지 않고는 못 베길 상황이 나오질 않았더냐. 차분히 안정된 상태에서 생각해보라. 말을 놓으라는 자신의 주군에게는 하대를 구사하다가 그 잘난 ‘주군’에게도 안하는 존댓말을 이곳에선 ‘평민’에 불과한 친우에게 한다, 라! 웃기다. 그것도 너무 너무 너무 많이. 대자누님의 표정을 보니 유체이탈이라도 한 사람처럼 혼이 빠져나간 표정이다. 이것을 두고 뒤통수친다, 혹은 반의 반전이라 말하는 것인가.

하지만 대자누님. 당신은 나 같은 선인을 친우로 둔 것을 일평생 행운이라 여기라고. 쿡쿡.

“희, 희노 양. 말 놓으세요. 푸하핫. 나도 그게 더 편해.”

희노 양은 내 말에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습… 아니, 알았어.”

“저한테도 말 놓으셔요. 후후훗, 새삼 대자형님이 불쌍하게 느껴지는 군요. 이야, 정말 대단하십니다.”

바야흐로, 대자누님의 수난시대가 선포되는 순간이었다.

‘희노! 난 당신이 더 존경스러워! 쿠쿠쿡!’


얼마나 걸었을까. 꾸불꾸불한 길―아니, 구름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을 지나 반시간 가량 걸어가니 초라하기 그지없는 집 한 채가 보이기 시작했다. 대리석으로 지어진 다른 집들에 비해 여러 개의 나무판자를 이어붙인 판잣집이었는데, 나무판자의 길이는 모두 재 각기였고, 서툰 못질에 중간에 접히거나 못 심이 삐져나온 것들이 허다했다. 딱 봐도 급조, 혹은 초보  라는 티가 팍팍 나 적지 않게 당황했지만, 군데군데 못이 있어야 할 자리만 쏙쏙 빠져있는 부분들을 훑으며 허탈해지는 건 왜일까. ‘전 이런 험악한 일은 못한답니다! 워낙에 고상해서.’라고 아예 대놓고 광고를 하는 기분이었다(품위 있고 예쁜 희노에 대한 쓸데없는 질투심이 발동된 탓이기도 했지만). 우리가 그 모습에 적잖아 당황하자 당사자인 희노는 멋쩍게 웃으며 먼저 달려가 문손잡이를 돌렸고 신세 처량한 문은 ‘삐그덕, 끼이익.’하는 듣기 거북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 삐그덕 삐그덕 대며 집에 달려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그 모습이 무척 위태로웠다. 그렇게 힘겹게 열린 문 위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부스럭 거리며 문틈이나 천장 따위에 쌓여있었던 듯한 흙더미와 먼지가 우수수 떨어지는 걸 보니, 할말 다했다. 아무리 은신처라고는 하나, 뭐랄까. 희노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이튠을 능가하는 시커먼 유령들이 ‘우워워워!!’하면서 튀어나올 법한 폐허를 연상케 했다.

“드… 들어와.”

희노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볼을 긁적이며 어** 웃었다. 어지간히도 창피한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한층 더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에 짓눌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우리가 더 뻘쭘 해졌다. 아무런 대꾸조차―심지어 대자누님까지!―하지 않은 우리들은 조심스레 집 안으로 발걸음을 들였고, 순간 머릿속을 아찔하게 만들만큼 코를 찌르는 퀴퀴한 냄새에 흠칫, 몸을 떨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징글맞은 거미줄. 집 안의 구석진 곳곳과 가구와 가구 사이사이 마다 가느다란 은사 줄의 거미줄이 쳐있었다. 두 번째로 들어온 건 깨진 창문을 투과한 아스라이 쪼개지는 햇빛 속 유유히 떠다니는 희어 멀건 한 먼지무리. 잿빛폭설이라도 내린 듯 마냥 수북이 쌓인 먼지들이 타인과 경계선을 긋고 있는 희노를 보는 것만 같아 안타까웠다. 아직 그녀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은 내가 어째선지 인지하지 못하겠지만.

사뿐히 걸어 먼지가 수북이 쌓인 의자 시트를 손으로 대충 턴 희노는 옆 편에서 손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며 앉으라고 권했다. 그 상황에서 나와 선이는 전보다 더 어** 하하거리며 기꺼이 의자에 앉아보임과 동시에 이곳에 살긴 사는 건가 하는, 마지막으로 이곳에 묵었던 시간이 더욱이나 미심쩍어지는 순간이었다. 희노 마저 의자에 앉자 혼자 우두커니 서있던 대자누님은 미간을 찌푸리며 턱을 매만지다가 자신이 앉아야할 의자를 손으로 한 번 더 훑고는 희노가 했던 것처럼 손을 탈탈 털며 자리에 앉았다. 궁상맞게 시리, 깔끔한 척 하기는.

“희노.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대자누님의 질문에 말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머뭇거리던 희노는 입술을 한번 잘근 깨물고는 입을 열었다. 명백히 수치스럽단 의사표현 같았다.

“…말하자면 좀 길어. 때가 되면 알려줄게 대자누님. 어차피… 곧 알게 되겠지만…….”

희노는 잠시나마 애상에 젖어 씁쓸한 미소를 짓다가 무언가 퍼뜩 떠올랐는지 험악한 인상으로 대자누님에게 소리쳤다.

“그리고 내가 여길 뜨질 못하는 이유는 사실 대자누님 때문이잖아! 그래, 그 때 다짜고짜 여길 맡아달라고 애걸복걸 해놓고는. 아아, 그러고는 몇 시일도 안 되서 행방불명되고…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아? 정말, 울고 싶었다고!”

대범하게도 희노는 대자누님의 미간을 집게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대며 대자누님을 제압했다. 이제 말까지 놓았겠다, 거스를게 없단 것일까! 아님, 그만큼 쌓인 울분이 주군이란 이름의 의미를 잊게 할 만큼 한 아름 된다는 것일까.

“그, 그건 강제 텔레포트 당한 거라니까!”

대자누님은 거의 반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자기 잘못을 아는 건지 몸을 잔뜩 움츠러든 대자누님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가 희노는 눈썹을 한번 꿈틀대고는 양 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아아, 됐다, 됐어.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이니까. 그나저나… 자, 이제 대충 자리도 잡았겠다, 여기 ‘오시리아 대륙’을 원정하게 된 계기가 들어볼 수 있을까? 이제 와서 운운하긴 뭣하지만, 나도 엄연한 이곳 백성이야. 만의 하나 악의라도 품고 행한 일이었다면, 곤란하다고. 뭐, 대자누님이 데려왔으니 신뢰할 근거는 충분하겠지만, 하아… 누가 믿고 싶겠어.”

희노는 정말 진심을 다해 마지막 뜻을 전했다. 대자누님이 들었다면 어떤 불호령이 내려질지 궁금하지만 안타깝게도 보물섬에라도 온 사람처럼 휘둥그레 진 눈으로 집안을 탐색 중인 그가 들을 리는 만무했다. 게다가 속삭이듯 한 조용조용한 목소리가 한몫했기도 했고. 여하튼 보기와는 다르게 재밌는 사람일지도.

나는 희노의 악의 없는 질문에 두텁게 박수를 두 번 짝, 짝 쳤다. 반응이 온건 즉각 이었다.

“이야, 또 제가 나서야 되는 시점입니까?”

나는 너무도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럼! 너 말고 누가 있겠냐. 난 그런 머리 아픈 건 질색이라고~. 선아, 너도 알잖니? 호호호!

마음속으로 선이에게 말하며(물론 알아들을 턱이 없지만) 진득한 눈으로 선이를 향해 웃었다. 선이는 자신이 나설 시점이 생겼다는 것이 기쁜 건지, 혹은 타인에게 자신의 지식을 나눠주는 것이 좋은 건지―…아쉽게도, 전자 같다― 싱글벙글 웃으며 허벅지에 손을 텁, 하니 올려놓으며 우리들이 이곳까지 오게 된 궁극적 목적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크게 자각하고 있지 않았던 터라 조금… 신선했다.



제 4화 오르비스의 비화



이건 아주 먼 이야기야. 이 이야기를 할 때면 달콤한 로네펠트 아리쉬몰트 차를 준비해야하지. 아주 긴 시간을 넘어가야 하니까. 귀를 쫑긋 세우고 듣도록 해. 난 두 번 말하는 건 싫어하거든.

넌 지상으로 낙하해버린 파랑새를 알고 있니? 그새는 너무 어려, 어미 새가 잠시 한눈파는 세 그만 나무둥지 아래로 떨어져 버렸단다. 솜사탕 같은 구름위로 날아오르고 싶었던 건지, 단순한 실수인진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 어린 파랑새는 어떻게 되었을까. 죽어버렸을까? 심장이 멎어버렸을까? 날개라도 부러져 버렸을까. 어린 파랑새는 다시 둥지로 날아오르지 않았어. 슬피 우는 어미 새의 눈물에 보답하지 않았던 게지. 반드시 살아있으리라 애써 자신을 **하며 어린 파랑새를 찾아 나선 어미 새를 뒤로 한 채 말이다. 자, 이제 네 머리로 상상해 보거라. 요즘 아이들은 상상력이 뛰어나더군. 뭐라고? 오, 아니야. 어린 파랑새는 죽되 죽지 않았지. 몸은 모두 망가지고, 호흡도 가빴지만 죽지 않았어. 아니, 오히려 그대로 숨통을 끊어버리는 게 어린 파랑새를 위한 길일지도 몰라. 무척 고통스러워했거든. 쉬쉬 내쉬는 가는 숨과 축 쳐진 두 날개는 가히 애처로워 보였단다. 온통 어둠뿐인 세상이었지. 긴긴 세월 어린 파랑새는 그렇게 내동댕이쳐져 있었단다. 어미 새는 어찌되었느냐고? 서두르지 말거라. 이제 곧 나올 테니까.

옛말에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하루가 일주일이 되고, 일주일이 한달이 되고, 마침내 어린 파랑새를 찬은 건 봄이 여름이 되었을 시점이었다. 피는 말라붙어 검붉은 구슬이 되어있었고, 동백기름이라도 바른 듯 탐스럽던 파란 깃털은 반쯤 벗겨져 여린 살갗을 햇빛에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었지. 태양은 무척 뜨거웠는데 말이야. 보기 좋던 살은 배가 등딱지에 붙은 것처럼 앙상한 갈비뼈를 드러내고 있었다지. 숨을 쉴 때마다 움직이는 갈비뼈는 과히 보기 좋지 않았다. 반쯤 풀린 게슴츠레한 눈엔 생기가 없었어. 죽은 시체같이 끔찍했지. 어미 새는 꺽꺽 소리를 내며 어린 파랑새를 조약 같은 부리로 건드려 보았단다. 무척 조심스러웠고, 또 떨렸지. 다행히 숨은 붙어있었다지만 몸도 마음도 너무 병들어있었어. 검은 반점 맺힌 피부와 축 늘어진 날개. 주변엔 날 파리가 꼬이고 있었지. 어미 새는 두려웠단다. 나의 아이가 죽어가고 있구나. 어미 새는 눈물을 흘려, 어린 파랑새의 목을 축여주었다지. 탐스럽던 깃털을 뽑아 몸을 덮어주었다지. 먹이를 물어와 씹어 넣어주고, 날수 없는 어린 파랑새를 위해 작은 둥지를 만들어 주었다는 거야. 하늘의 도움인지 어린 파랑새는 회복하였단다. 하지만 날 수 없었지. 날수 없는 새가 된 거야. 하지만 어린 파랑새는 울지 않았어. 오히려 슬퍼하는 어미 새를 위로했다는 거야. 어미 새는 매번 먹이를 물어다 주었고, 어린 파랑새는 둥지를 다듬었어. 그리고 이상적인 둥지를 완성했을 때, 어린 파랑새는 더 이상 어미 새를 반기지 않았단다. 무슨 심경의 변화였을까? 그건 어린 파랑새뿐이 알지 못하지. 애성담긴 목소리로 부르는 어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어린 파랑새에게 들리지 않았다는 거야. 오히려 사납게 선 부리로 얼굴을 쪼아버렸어. 날지 못하는 날개를 퍼뜩 세우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어미 새를 위협했다는 거야. 그것이 또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달이 되어도 계속되자 마침내 지쳐버린 어미 새도 더 이상 어린 파랑새를 찾지 않았다더라. 그 채로 한해, 두해가 흐르고 어린 파랑새와 어미 새는 서로의 기억 속에 잊혀져 갔다더라. 오, 그런 의미는 아니야. 감정이 식어갔단 거야. 분명 서로의 존재감은 뚜렷이 느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 어리석었지. 넌 현명하리라 믿는 단다.

얼마의 세월이 흐른 것일까. 그래, 비가 오던 날이었을 거야. 추적추적 내렸었지. 질척한 땅에 어두운 하늘. 예감이 좋지 않았단다. 어린 파랑새는 본능으로 느꼈을 테야.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어느 한계점에 다다랐을 때, 어린 파랑새의 둥지는 점점 피폐해지기 시작했어. 망가지기 시작했단 거야. 그제야 깨달은 게지. 아,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그리고 어린 파랑새는 점점 죽어가기 시작했단다. 어미 새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마음의 병이 다시금 도져 버린 게지. 어린 파랑새는 한없이 어미 새의 품이 그리워지기 시작했어. 하지만 이미 너무 먼 길을 돌아왔어. 어린 파랑새는 염원했다. 그때로 다시 돌아 갈수만 있다면. 아니, 그전에 나무 위 둥지에서 날아오르지 말았어야했다. 그리고 그렇게… 어린 파랑새는 죽어갔단다.

지금 이 이야기가 그저 먼, 먼 한편의 설화라고 생각하고 있느냐. 저런, 겉껍데기만 보고 있구나. 보거라. 주위를 둘러 보거라, 이미 일은 일어나고 있지 않니?


“…으로서, 현재 저희가 이곳에 오게 된 겁니다. 이미 빅토리아 대륙의 자치력은 무력해진지 오래입니다. 균등한 상관관계를 유지해오던 인간과 몬스터들 간의 조화는 깨져버렸고, 남은 건 빠른 퇴보와 죽음 뿐. 정치 원동력이자 최고의 권력기구로 입지를 굳혀오던 원로원마저 손을 뗀지 오래입니다. 마을 젊은이들은 피비린내 나는 전장으로 떠났고, 마을엔 생기조차 없죠. 여기저기 닫힌 문은 가히 폐쇄적이며 고요합니다. 심지어 어린아이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으니까요. 시계태엽처럼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흘러 보낼 따름이죠. 활짝 피었던 꽃은 이미 시들어 버렸습니다. 꽃씨하나 남기지 않고.”

“그래서 이곳 오시리아 대륙에 도움을 청하러 왔다?”

선이는 한꺼번에 말을 쏟아내서인지 혹은 이런 말을 희노에게 하는 것이 수치스러운지 목청을 한번 가다듬으며 말했다. 싫은 기색이 영력한 투였다.

“아쉽게도.”

라며, 선이는 슬쩍 고깔모자를 벗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고깔모자 끝자락을 꼭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드문드문 햇빛에 반짝거렸다. 경각 말을 시작한 이래로 내보이지 않던 미소를 입가에 띠운 그는 다시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의 말을 빌려, 아쉽게도 억지웃음이었다. 희노는 그 때를 기다렸다는 듯 마냥 힘 있는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이미 그쪽에서 교류를 거부한 전적이 있고, 오시리아 대륙은 풍요롭지. 이도저도 이윤을 아무리 따져본다 한들, 우리 쪽이 꽤나 깨질 것 같은데? 그렇다고 이해관계를 논할 처지도 아니지만.”

정곡이다. 비수를 꽂아 넣는 희노의 말에 몸이 경직되어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저 말은 여느 거지가 부잣집에서 ‘쌀 한 톨만…’이라 구걸했을 때 대뜸 ‘너 왜사냐?’라는 말을 ‘왜왔냐?’라는 말로 순환해서 한, 단숨에 상대방을 무안의 경지에 이르게 할 뿐더러, 비참해지게 하는 뭐, 그런 것?

“모든 일엔 인과응보가 따르는 법입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선이의 대답에 희노가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그 일을 우리에게 떠맡길 심상이야? 아님, 유도심문인건가?”

“단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듯, 이미 빅토리아 대륙은 자치력을 잃었습니다. 다시 말해, 저희 빅토리아 대륙의 균형을 깨트린 직접적인 요인은 내부에 없단 겁니다. 아니, 찾을 수 없단 말이 더 정확하겠군요.”

“그래서 찾으러 왔다?”

비꼬듯 말하는 희노의 붉은 눈동자가 햇빛을 반사해 섬뜩하게 빛을 냈다. 희노가 저런 말투를 썼었나?

“예.”

선이의 목소리엔 가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예상대로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칼 없는 싸움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일까. 어찌 보면 치열한 전투보다도 무섭단 생각이 들었다. 대자누님마저 입 꾹 다물고 상황전개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한동안 둘은 다분히 침묵을 지켰고 우리들 사이엔 알 수 없는 무거운 기류마저 맴돌았다. 자, 희노는 과연 어떻게 나올까나. 다짜고짜 ‘발칙한 녀석들!’이라며 활을 쏘진 않겠지, 암.

“좋아. 어쨌든 우리가 의심 받는 건 원치 않으니까. 이대로 버티는 것이 오히려 골을 더 깊게 파게 되는 일이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이대로 너희를 돌려보냈다가 떨어질 대자누님의 불호령이 무섭기도 하고 말이야. 또 쉽게 돌아갈 너희들이 아니잖아?”

라며, 힘 빠지게 웃는 희노였다. 말은 가볍게 했지만 속으론 많이 다듬고, 다듬어 한말이리라. 선이 또한 조마조마해 하고 있던 찰날 의외로 쉽게 들려온 긍정의 대답에 깊은 숨을 내쉬었다.


질문자 캐릭터
질문자 캐릭터 아이콘폐병걸린년 Lv.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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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6063

  • 캐릭터 아이콘by설은란 2014.07.09

    이야~ 분량도 그렇고 문체도 그렇고 진짜 글 잘쓰시네요~ 50줄 겨우 넘을까 말까하거나 대본체로 되어있는 소설이랑은 차원이 달라요~

  • 캐릭터 아이콘제논thfwl 2013.01.19

    핸드케논은 그 개같은 거짓말을 믿냐? ㅄㅅㄲ

  • 캐릭터 아이콘제논thfwl 2013.01.19

    버그방지선----------------------------------------야 작작 개말투 써라--------------------------------------------------------------------------------------------------------------------------------

  • 캐릭터 아이콘에반54542545 2012.12.20

    ....................

  • 캐릭터 아이콘타르보워리어 2012.12.05

    이게진정한 소설인듯 여태것 초딩꺼만봐서그런가 좀읽기 어렵네

  • 캐릭터 아이콘드레고플래이 2012.08.22

    ....

  • 캐릭터 아이콘햄스쩐님 2012.08.05

    우와~@*@ 완전길어여~~!! 읽는데하루걸리겠어여!!

  • 캐릭터 아이콘채연이앤가영 2012.08.05

    데바기다. 저랑완전 하늘과 땅차이

  • 캐릭터 아이콘0핸드캐논0 2012.06.28

    엄청 길다, 올리려면 2ㅅ시간은 그냥 소요되겠네.

  • 캐릭터 아이콘0핸드캐논0 2012.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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